기념식 무기 연기…13일 비상대책회의 열어
사고 때마다 ‘사후약방문’남발…‘도로아미타불’
국가인권위 조사‘선수 40%가 감독, 코치에게 맞고 산다’
(성)폭력의 악순환 고리 끊을 근본 대책 수립과 의식 전환 시급
[MK스포츠] 대한체육회가 13일로 창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대한체육회는 이날 1920년 7월 13일 서울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출범한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의 지난 1세기를 되돌아보고 자축하는 ‘대한민국 체육 100년 기념식’을 정세균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할 계획이었다. 코로나 19사태를 의식, 행사 장소인 3천 명 수용의 서울올림픽 공원 올림픽 홀에 6백 명만 초청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 6월 26일 폭력을 이겨내지 못한 대한철인3종협회의 최숙현(22) 선수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여론이 거세지자 지난 8일 이 행사를 무기 연기했다. 대신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과 같은 체육계 폭력 재발 방지를 위한 ‘스포츠 (성)폭력 근절 다짐 결의대회’를 열기로 했다. 스포츠계 폭력 근절 및 인권 보호를 위한 유관 체육단체장 결의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 이 행사에는 축구, 야구 등 77개 회원종목단체장과 17개 시도 및 228개 시군구체육회장 등이 참석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건만 터지면 재발 방지 결의대회를 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이 나오자 10일 '스포츠 (성)폭력 근절 다짐 결의대회'를 취소하고 반폭력과 스포츠 인권증진을 위한 근본적인 반성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비상대책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방향을 다시 바꾸었다. 최숙현 선수의 비극이 일제 강점기 유일하게 극일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조선체육회의 창립취지를 무색하게 할 만큼 그 충격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잊을만하면 불거지는 (성)폭력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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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체육회가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국가대표 출신 故최숙현 사망 여파로 창립 100주년 행사를 연기하고 비공개 스포츠 (성)폭력 근절 비상대책회의를 연다. 생전 고인 모습. 사진=AFPBBNews=Nwes1 |
대학선수 10명 중 3명 구타당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작년 12월 발표한 ‘운동선수 인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대학의 경우 국내 102개 대학 응답자 4924명 중 1613명(32.8%)이 구타 등 신체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선수 10명 가운데 3명이 폭력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다. 이 중 255명은 일주일에 1~2회 이상 상습적인 폭력을 당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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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약방문…2008년 이후 12년간 9번 대책발표
문체부는 체육계에서 성폭력과 폭력, 승부 조작 등 비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대책을 내놨다. 2007년 5월 여자 프로농구팀 감독이 미국 전지훈련 중 선수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한 혐의로 구속되자 2008년 2월 ‘스포츠 성폭력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이후 작년 1월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 폭행 사건까지 정부가 12년간 발표한 스포츠 비위 관련 대책만 9개다. 성폭력, 승부 조작에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고, 지도자 징계 정보를 체육 단체가 공유하며, 비위 지도자 자격을 취소한다는 내용 등이 수차례 담겼다. 하지만 이들 대책은 ‘사후약방문’에 불과, 스포츠계 폭력이 끊이지 않고 되풀이되고 있다.
감사원이 지난 2월 발표한 ‘국가대표 및 선수촌 등 운영·관리 실태’ 감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체육회가 2016~2019년 성폭력 등으로 징계 처분한 104건 중 33건은 징계 기준 하한보다 낮게 처리됐다. 무관용 원칙이 적용되지 않은 것이다. 2016~2019년 초·중·고 운동부 지도자 비위 173건이 각 체육 단체에 통보돼야 하는데도 이 중 152건(87.8%)이 통보되지 않았다. 2014~2018년 폭력 등의 이유로 징계받은 체육 지도자 97명 모두 자격증 취소 및 정지 조치를 받지 않았고, 이 중 15명은 작년까지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근무했다. 2014년 스포츠 4대악(승부 조작, 성폭력·폭력, 입시 비리, 조직 사유화) 척결을 위해 만들어진 스포츠 비리신고센터는 체육 단체 임원 관련 비리 신고를 접수하고도 1~4년간 내버려두는 경우가 있었다. 위법 사실을 확인하고도 해당 단체에 징계를 요구하지 않고 종결한 사건도 7건이나 된다.
대한체육회 등 최숙현의 도움 요청에 대처 못 해
최숙현 측은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 대한철인3종협회, 경주시청,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지검 경주지청 등 5개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서로 정보 공유나 협조가 없어 사건 처리가 늦어졌다. 최숙현의 아버지는 2월 6일 경주시청을 찾아가 민원을 접수시켰지만, 경주시 체육회는 4월 경주경찰서가 자료를 요청하기 전까지 사건 자체를 몰랐다.
최숙현 측은 4월 8일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에 이메일로 신고했다. 그런데 조사관은 5월 18일 최숙현이 보낸 자료를 보고서야 선수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대한철인3종협회 역시 선수 관리 파일에 선수의 ‘의료 기록’이 없었다. 철인3종협회는 지난 2월 이 사건을 인지했지만, 해당 감독으로부터 ‘문제없다’는 얘기만 듣고 추가 조사를 하지 않았다. 가해자 말만 듣고 ‘제 식구 감싸기’를 한 것이다.
만연한‘성적지상주의’ 체육계 폭력 조장
국내 운동선수들은 대개 초등학교 3~4학년 때 운동을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무한경쟁에 노출된다. 그리고 이런 환경은 “메달만 따면 된다”는 성적지상주의로 이어진다. 한 실업팀 선수는 인권위 조사에서 “실업팀 감독입장에선 선수 육성보다 작은 대회라도 우승해 자신의 실적을 쌓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생계가 유지된다”고 했다. 또 다른 선수는 “지면 선수 탓을 한다”며 “그게 심해지면 지도자로선 하면 안 되는 행동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여기에 어릴 때부터 합숙 훈련을 하면서 생기는 체육계 특유의 폐쇄적인 문화까지 더해지면서 폭력이 되풀이된다.
“어릴 때부터 운동만 해왔고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이 운동하는 선후배랑 긴 시간을 함께했고 거기에서 폭력과 가혹행위의 대물림에 익숙해지는 것이 문제다. 하루 모든 시간을 운동만 하고 제대로 된 교육 한번 못 받다 보니 인성교육은 아예 포기하고 모든 폭력사태가 근절되지 않는 것이다. 운동선수들의 근본적인 교육시스템과 교육환경이 바뀌어야 하고 관련자들의 의식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 네 일, 내 일 따지며 서로에게 떠 넘길 것이 아니라 ‘우리 일’이라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 모든 구조를 살펴보고 협력하여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 선수들 개인의 의식 구조가 바뀌고 관련 기관의 행정이 바뀌어야 한다.” 한 네티즌의 지적이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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