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의 거장 고 박경리 선생은 생전에 한(恨)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한(恨)을 한때는 퇴영적인 국민정서라 했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해석을 잘못한 거예요. 일본은 한을 '우라미'라고 하는데 우라미는 원망이에요. 원망이 뭐냐, 복수로 가는 거예요. 일본의 원망이나 복수가 일본 예술 전반에 피비린내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복수고, 그게 어디로 가냐면 일본의 군국주의로 가요.
우리의 한(恨)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지만, 내가 너무 없는 것이 한이 되어서... 말하자면, 내가 뼈가 빠지게 일해서 땅을 샀다. 내가 무식한 것이,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것이 너무나 한이 되어서 내 자식은 공부시켰다. '미래지향'이거든요. 소망이거든요. 이게 절대로 퇴영적인, 부정적인 정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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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택에게 우승은 마지막 남은 한이다. 사진=김영구 기자 |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만 여겨졌던 한이 미래 지향적 정서라는 해석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야구판에서 한의 정서는 널리 쓰인다. 대표적인 예가 우승에 대한 한이다. 선수 인생에서 우승 한 번 경험해보지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가 대단히 많다. 그들에게 우승은 한으로 남아 있다.
이 정도만 얘기해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가 있다. LG 맏형 박용택이 주인공이다.
박용택은 2002년 LG에 입단해 19년째 한 팀에서만 뛰었다. 하지만 신인이던 2002년 이후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지 못했다.
2년 전 FA 2년 계약을 맺으며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박용택이다. 그에겐 올 시즌이 한을 풀 마지막 기회다.
박용택의 마지막 시즌을 앞두고 박경리 선생의 정의가 떠오른 이유는 그가 진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박용택에게 우승은 마지막 남은 한이다. 야구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누린 박용택이다. 단지 우승 반지 하나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LG가 우승을 하지 못한 것은 남의 탓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해서 풀릴 한이 아니다. LG 스스로 일어나 트로피를 들어올려야 한다.
박용택의 책임감은 더욱 무겁다. 미래지향적 정서인 한을 풀기 위해선 단순히 우승을 노리는데 그쳐선 안된다.
LG가 매년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갖춘 팀, 그런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팀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감독과 프런트에 있다. 하지만 박용택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팀내 최고참으로서 후배들에게 무언가 남겨주고 떠나야 한다. 자신처럼 우승 경험을 하지 못하고 은퇴할 수도 있는 후배들이 같은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선배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보는 것 만으로도 공부가 되는 교훈이 돼야 한다.
팀을 위한 희생도 필요하다. 팀이 이기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어떤 거인지를 보여줘야 한다. 자신이 겪은 아픔을 후배들은 겪지 않도록 제대로 한 풀이를 해야 한다.
물론 올 시즌이 마지막 기회라는 점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스스로 한의 사슬을 끊는 활약이 필요하다. 박용택에게는 여러 가지 숙제가 주어진 시즌인 셈
한은 미래지향적 정서다. 내 아픔을 내 후배들은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거이 진정한 한풀이다.
만에 하나 박용택이 끝내 한을 풀지 못하더라도 한을 풀 수 있는 씨앗을 뿌리는 시즌이 돼야 한다. 그것이 진정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을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 될 것이다.
정철우 MK스포츠 전문위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