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안준철 기자] “아무래도 롯데 경기를 자주 보지.”
강병철(72) 롯데 자이언츠 전 감독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사령탑 중 한 명이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3루수 강타자로 선수시절을 보낸 강 전 감독은 한일은행에서 현역 은퇴 후 1978년 동아대를 시작으로 감독이라는 직업에 발을 딛기 시작, 롯데, 한화 이글스, SK와이번스(초대 감독)의 사령탑을 맡아 통산 914승을 거뒀다. 오랜 감독 생활 중 롯데에서 한국시리즈 두 차례 우승(1984, 1992)을 이끌었는데, 이는 롯데가 2017시즌까지 기록한 우승 기록의 전부다.
2008년 우리 히어로즈 2군 감독을 끝으로 현장에서 물러난 그는 지난 7월14일 울산 문수구장에서 열린 2018 KBO리그 올스타전 시구자로 나서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냈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열린 롯데와 NC다이노스의 준플레이오프 시구자로도 부산 사직구장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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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MK스포츠와 인터뷰 중인 강병철 전 감독. 사진=안준철 기자 |
현장을 떠난 지 오래지만 야구는 매일같이 본다. 강 전 감독은 “전경기를 중계해주니까, 중계로 접하고 있다”며 어느 팀 경기를 자주 보냐는 질문에 “롯데 경기를 주로 본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롯데와 강 전 감독은 애증의 관계다. 롯데에서만 세 차례 감독을 했다. 한 팀을 세 차례에 걸쳐 맡은 이는 프로야구에서 강 전 감독이 유일무이하다. 더구나 그 팀의 두 차례 우승을 모두 이끈 감독으로 남아있다.
강병철 전 감독은 만 38세때인 1984년,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은 1984년 한국시리즈는 역대 한국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명승부로 꼽힌다. 처음으로 최종전인 7차전까지 갔고, 전무후무한 故 최동원(전 한화 2군 감독)의 4승이 나왔다. 시리즈 전적 4승3패로 최동원이 7경기 중 5경기에 등판 40이닝 4승 1패, 평균자책점 1.80의 기록으로 팀의 모든 승리를 이끌었기에 최동원시리즈라고 불린다. 지금 생각하면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강 전 감독은 혹사 논란에서 비난을 받는다. 이 또한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강 전 감독은 “당시는 말이 프로이지, 실업야구와 같았다. 이는 상대였던 삼성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은 김일융과 김시진이 주로 던졌다. 당시 시스템은 잘 던지는 투수 2~3명 가량이 있으면 이들을 제외하면 모두 불펜 대기다. 그러다가 선발투수가 점수를 많이 내줬을 때 나가는 투수 3명 정도, 리드하고 있을 때 올라가는 투수 3명 이 정도였고, 경기 후반이 되면 선발투수급 선수가 막으러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객관적인 전력상 롯데는 삼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시 전·후기리그제였기 때문에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은 한국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골랐고, 후기리그 막판 져주기 논란을 일으키며 롯데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상황도 있었다. 어쨌든 롯데는 최동원이라는 불세출의 에이스가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강 전 감독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명승부였다”며 미소를 지었다.
1991년 두 번째 롯데 감독을 맡아 4위로 팀을 이끈 강병철 전 감독은 이듬해 롯데를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롯데가 기록한 가장 최근 우승이기도 하다. 더구나 당시 롯데의 우승도 극적이었다. 롯데는 당시 정규리그 3위로 준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가을의 돌풍에 있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올라온 팀의 사상 첫 우승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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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KBO리그 올스타전이 14일 울산 문수야구장에서 열렸다. 강병철 롯데 전 감독이 시구를 하고 있다. 사진=옥영화 기자 |
강병철 감독은 “1984년을 잊을 수 없다면, 1992년은 가장 기억이 남는 한국시리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롯데의 선수층이 얇다보니, 우리보다 전력이 약한 팀과의 경기에서 승수를 올리는 전략으로 가져갔다”고 덧붙였다. 당시 롯데는 3할 타자가 5명(전준호 이종운 박정태 김민호 김응국)이었지만, 소총부대로 불릴 만큼 장타력과 거리가 먼 팀이었고, 마운드는 윤학길 염종석(이상 17승) 故 박동희(7승)를 앞세웠다. 강 감독은 “당시만 해도 선발로테이션이 3일 휴식 후 등판이었다. 역시 선발 중 한 명이 마무리로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며 “삼성과 준플레이오프는 해볼만했다(박동희 염종석 두 명의 투수로 모두 승리). 해태와 플레이오프를 5차전까지 치르면서 승리하니까 선수들의 경기력이 더 살아났다. 시즌 초와 비교했을 때 경기력이 2배 가량 올랐다”고 설명했다.
버리는 경기는 확실히 버리고, 잡는 경기는 확실히 잡는 전략은 한국시리즈에서도 통했다. 정규시즌에는 다소 부진했다가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한 박동희가 1차전 선발로 나서 기선을 제압하는 승리에 발판을 놨고, 2차전은 기대하지 않았던 선발 윤형배의 호투로 잡았다. 결국 분위기를 탄 롯데는 4승1패로 시리즈를 석권했다. 강 전 감독은 “사실 박동희는 정규시즌 기간 중 속을 썩였다. 신인이었던 염종석이 상대적으로 약한 팀에 주로 나가고, 자기가 강한 팀 상대로 등판해서 불만이 많아서, 2군으로 내려보내기도 했다. 이후 잘 다독이면서 한국시리즈까지 별 탈 없이 치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버리는 경기를 확실히 버리다 보니 오해를 사기도 했다. 강 전 감독은 “당시 구단 경영진은 해태와 반경기차로 3위를 차지했기에 충분히 2위까지 노릴 수 있지 않냐고 생각했나보다. ‘왜 열심히 하지 않느냐’는 질책도 들었다. 하지만 당시 정규리그에 모두 힘을 쏟아 부었으면 포스트시즌에서 꼬였을 것이다”라고 덤덤히 말했다. 이어 “당시에는 모든 게 그랬다. 야구를 잘 모르는 경영진들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될 이유를 들어 꼬투리를 잡았다”며 웃었다.
사실 강병철 전 감독은 롯데를 관둘 때 과정이 좋진 않았다.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고 1986년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 당시 이희수 코치(전 한화 감독)의 계약금과 관련 “애들 과자값 정도 생각하면 안된다”라는 발언이 빌미가 돼 재계약이 불발됐고, 1년을 쉰 뒤 빙그레 코치로 갔다 1991년 다시 롯데 감독으로 돌아왔다. 강 전 감독은 “정확히 껌값이라고 말했는데, 사실 윗선에 왜곡돼 보고됐고, 당시 구단주 대행이었던 신준호 회장(신격호 회장의 동생, 현 푸르밀 회장)에게 해명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92년 우승 후에도 1993년 계약이 만료되자 롯데와 재계약하지 않고 한화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 전 감독은 “당시 돈 때문에 가냐고 욕을 많이 먹었다. 물론 분명 돈 때문은 아니었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조건은 롯데가 더 좋았다”며 “물론 다 옛날 얘기 아니냐”며 껄껄 웃었다. 결국 연어처럼 강 전 감독은 자신의 감독커리어의 마지막을 롯데에서 마쳤다. 다만 마지막 롯데 감독 시기(2006~2007년)에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다. 롯데 암흑기의 끝자락이었다. 그래도 강병철 감독 시기에 기회를 받았던 강민호가 주전 포수로 성장하는 성과가 있었다. 이대호는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가 됐다. 강 전 감독은 “다 지들이 잘 해서 그런 것 아닌가”라고 웃었다.
현장을 떠난 지 오래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여전했다. 강병철 전 감독은 “요즘 들어 프로야구도 많이 발전했다고 하는데, 밖에서 보는 입장에서도 그런 것 같다. 초창기에는 부족한 게 많았다. 선수들의 처우도 많이 좋아졌다. 그만큼 팬들이 만족할만한 경기를 보여줘야 하고, 팬서비스에도 신경써야 한다”고 당부했다.
강병철
1946년 8월21일 생
180cm 85kg
동신초-대신중-부산상고-우석대
크라운맥주(1965)-해병대 야구단(1966~1969)-한일은행(1970~1977)
동아대 감독(1978~1982)-롯데 자이언츠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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