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상철 기자] “월드컵 본선 조 추첨 현장에 앉아 지켜보는데 심경이 참 복잡하다. (현실적으로 이뤄지지 않겠지만)머릿속으로는 저마다 최상의 조가 걸리기를 희망한다.”
월드컵 본선 조 추첨 현장에 참석했던 전임 대표팀 감독의 경험담이다. 다른 나라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조별리그는 월드컵 본선의 첫 관문이다. 기왕이면 부담이 덜한 조를 만나는 걸 바라는 게 이상하지 않다.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월드컵 본선을 밟는 모든 나라의 공통된 희망사항이다. 그 바람이 이뤄질 지가 결정될 날이 밝았다.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조 추첨이 2일 0시(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진행된다. 6개월 뒤 만날 상대는 누가 될까.
↑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이 곳에서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조 추첨이 열린다. 사진=ⓒAFPBBNews = News1 |
러시아월드컵 본선 조 추첨 방식은 간단하다. 32개국이 포트 4개로 나눠진 가운데 포트별 추첨 순서에 따라 8개 조에 배치된다.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같은 포트끼리는 한 조에 속하지 않는다. 또한, 대륙별 안배 원칙에 따라 유럽을 제외한 같은 대륙이 조별리그에서 맞붙지도 않는다. 14개국이 출전하는 유럽도 한 조에 최대 2개국만이 포함된다.
포트 구성은 이미 끝났다. 2017년도 10월 국제축구연맹(FIFA) 세계랭킹 순으로 포트를 정했다. 개최국 이점을 받은 러시아(10월 기준 65위)만이 예외다. 러시아를 비롯해 독일, 브라질,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벨기에, 폴란드, 프랑스가 톱시드(포트1)를 배정 받았다.
한국은 일본,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세르비아, 나이지리아, 모로코, 파나마 등과 포트4에 들어갔다. 한국이 포트4 외 무조건 피하는 상대는 포트3의 이란뿐이다. 나머지 23개국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포트1 상대가 누군지는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한국은 역대 월드컵에서 2002 한일월드컵을 제외하고 톱시드에 포함된 적이 없다. 강팀과 대결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게다가 이긴 적도 없다.
이탈리아(1986), 벨기에(1990·2014), 독일(1994), 네덜란드(1998), 프랑스(2006), 아르헨티나(2010) 등이 1986 멕시코월드컵 이후 한국이 상대한 톱시드였다. 전적은 1무 6무패로 일방적인 열세였다.
한국은 러시아월드컵 톱시드 8개국 중 역대 전적에서 앞서는 나라가 포르투갈과 폴란드(이상 1승) 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 한일월드컵 조별리그에서 거둔 승리였다. 두 팀 외 독일, 브라질도 한 차례 꺾었지만 모두 홈경기였다. 이번 월드컵은 러시아에서 펼쳐진다.
한국에게 포트2는 포트1보다 더 난관일지 모른다. 피해갈 상대가 없다. 스페인, 스위스, 잉글랜드, 콜롬비아, 멕시코, 우루과이는 최근 2개 대회에서 최소 한 번씩 조별리그를 통과한 경험이 있다. 스페인, 스위스, 우루과이와는 월드컵 본선에서 겨룬 적(2무 4패)이 있지만, 승리의 세리머니는 없었다.
↑ 손흥민의 눈물과 함께 세계축구의 높은 벽을 절감했던 2014 브라질월드컵. 손흥민의 2번째 월드컵은 어떤 결말일까. 그 하나의 과정이기도 한 2018 브라질월드컵 조 추첨은 꽤 중요하다. 사진=김영구 기자 |
유럽, 북중미, 아프리카, 아시아가 고르게 섞인 포트3는 이름값에서 포트1·2보다 떨어진다. 하지만 기세를 따지면 사정이 다르다. 세대교체에 성공한 스웨덴은 네덜란드, 이탈리아를 차례로 예선 탈락시켰으며, 유로 2016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아이슬란드의 동화는 끝날 줄 모른다.
코스타리카는 2014 브라질월드컵 8강의 돌풍을 일으켰으며, 에릭센이 이끄는 덴마크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랜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른 튀니지, 이집트, 세네갈도 예년과는 다른 강인함을 발휘했다.
상대적으로 아프리카를 만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얕봤다가 알제리에게 호되게 당했던 것이 불과 3년 전이다.
한국은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국 가운데 최약체로 분류된다. 2017년도 11월 세계랭킹 기준으로 32개국 중 30번째다. 한국 뒤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만 있다. 러시아는 월드컵 예선 경기를 치르지 않아 가중치에 불리한 점이 있다. 만만하거나 해볼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다. 완벽한 ‘마이너리티’다.
조 편성 상대만큼 중요한 것은 경기 장소다. 조 추첨과 함께 대진 순서가 결정된다. 경기 일정 및 장소는 이미 확정됐다. 톱시드가 아닌 팀은 해당 조의 2·3·4번의 추첨을 또 한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국가다. 우랄산맥의 동쪽 지역을 개최 도시에 배제했음에도 이동거리가 만만치 않다. 그만큼 환경의 차이도 크다. 한국은 브라질월드컵에서 기후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쓴 맛을 본 적이 있다.
예를 들어 개최도시 기준 최서단 칼리닌그라드와 최동단 에카테린버그의 비행시가만 3시간30분이다. 이 두 도시에서 최남단의 소치까지 거리 또한 상당히 멀다. B2, C3, F3의 경우 장거리 이동이 불가피하다.
↑ 스페인은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조 추첨에서 포트2를 배정 받았다. 톱시드 8개국이 가장 기피하고 싶은 상대다. 사진=ⓒAFPBBNews = News1 |
긴장의 끈은 32개국이 모두 쥐고 있다. 브라질월드컵에서 통산 4번째 우승을 차지한 독일도 마냥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각각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과 브라질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의 쓴 맛을 봤다. 둘 다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참가한 대회였다. 1998 프랑스월드컵과 유로 2000을 제패했던 프랑스도 한일월드컵에서 조기 탈락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한 번도 월드컵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한 러시아도 신경이 곤두선다. 개최국이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한 사례는 2010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유일하다.
32개국 중 16개국만 토너먼트에 오른다. 50% 확률이다. 각 조 2위까지 올라야 첫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강호’라고 호언장담할 수 없다. 가까운 예로 브라질월드컵만 해도 스페인, 이탈리아, 잉글랜드, 포르투갈, 코트디부아르 등이 조별리그 탈락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본선 조 추첨은 변수가 많았다. 죽음의 조가 심심치 않게 탄생했다. 브라질월드컵에서 스페인, 네덜란드, 칠레가 B조에 속했으며 우루과이, 이탈리아, 잉글랜드는 코스타리카와 D조에 편성됐다. 정상에 오른 독일도 조별리그에서 미국, 포르투갈, 가나를 상대해야 했다.
잉글랜드, 스웨덴,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가 한 조에 묶인 한일월드컵 F조나 나이지리아, 파라과이, 스페인, 불가리아가 포함된 프랑스월드컵 D조 등 역대급 죽음의 조는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당사자가 아닌 관전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재미와 반전을 보장하는 조다.
↑ 디펜딩 챔피언은 최근 월드컵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02 한일월드컵 이후 3번이나 다음 대회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2014 브라질월드컵 우승국 독일은 그 징크스를 깰 수 있을까. 사진=ⓒAFPBBNews = News1 |
여기에 포트2의 잉글랜드, 스위스, 콜롬비아, 멕시코, 우루과이도 최근 3개 대회에서 톱시드를 받은 적이 있다. 포트3의 덴마크, 아이슬란드, 코스타리카, 스웨덴은 복병이 될 가능성이 높은 팀이다. 아이슬란드가 잉글랜드와 유로 2016 16강 이후 재회하는 그림도 흥미롭다. 세네갈도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세네갈의 월드컵 첫 승 제물은 프랑스였다. 포트4에서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세르비아를 누군가는 피할 수 없다.
엇비슷한 전력의 팀끼리 만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