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황석조 기자] 야구가 감동적인 것은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성공신화부터 깜짝 새 얼굴의 등장까지.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이 중 가장 감격적인 것은 선수 개개인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반전의 모습이 아닐까. 최근 몇 년 간 KBO리그서 국민들을 감동 시킨 사연들을 꼽아봤다.
▲9년 만의 기적
전날 인천에서는 생소한 이름의 선수가 승리투수가 됐다. 바로 SK 김태훈(28). SK 팬들 아니고서는 다소 낯선 이름인데 신인이 아니다. 2009년 입단해 현재 데뷔 9년 차가 됐다. 그 동안 그는 평범한 투수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한 번의 스포트라이트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2011년에 16경기 출전이 가장 많이 나섰던 해.
그랬던 김태훈이 올 시즌 기회를 받기 시작했다. 힐만 감독 눈에 든데 이어 팀 선발후보들이 부진하자 그에게 역할이 주어졌다. 지난 세 번의 선발 등판서 기대감을 잔뜩 안기더니 전날 LG전서 5⅓이닝을 던지며 승리투수가 됐다. 9년 만에 승리투수. 그 역시 경기 후 “(동료들이 위기를 막아줬을 때) 짜릿했다. 소름이 돋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9년 만의 승리는 이토록 의미가 잔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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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 투수 성영훈(사진)이 7년 만에 1군에 오르는 의지를 보여줬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
지난 19일 두산은 낯설지만 익숙한 이름의 선수 한 명을 엔트리에 등록했다. 그의 이름은 투수 성영훈(27). 2009년 팀에 입단한 뒤 2010년까지 24경기를 뛰었지만 이후에는 그라운드에서 자취를 감췄던 흐린 기억 속의 투수다. 오랜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 성영훈은 7년 만에 기적적으로 다시 1군 마운드를 밟았다. ‘두산의 민간신앙’ 등으로 불리며 존재자체를 궁금해 한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536일 만의 기적이라 불렸다.
그는 19일 경기에 바로 투입돼 1이닝 동안 네 명의 타자를 상대했다. 다만 이후 다시 허리부상으로 말소됐다. 인간승리의 신화가 다시 꺼지게 된 걸까. 일단은 시작이 반이다.
▲야잘잘이 있기까지…
지금은 다소 주춤하지만 시즌 초 LG 트윈스 외야수 이형종(28)의 기세는 대단했다. 한 때 4할을 넘길 정도로 매서움을 자랑했다. 초반 LG의 상승세에 큰 역할을 해내기 충분했다. 지난해에 비해 장타력까지 보강된 올 시즌 이형종의 모습은 ‘천상타자’ 그 자체였다.
그러나 타자 이형종은 먼 길을 돌아왔다. 투수로서 화려한 주목을 받으며 야구를 시작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야구와 인연을 끊기도 했다. 방망이 아닌 골프채를 잡기도 했다. 끝내 야구를 잊지 못하고 3년 전 다시 그라운드를 밟은 이형종은 글러브가 아닌 방망이를 쥐고 타자로 재탄생했다. 그리고 그 누구 보다 빠르게 적응하며 이제는 팀을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했다. 팬들은 이제 그를 향해 ‘야잘잘’ 혹은 ‘광토마’라 부른다. 다 야구를 잘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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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수에서 타자로...LG 이형종(사진)이 올 시즌 최고의 활약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사진(잠실)=김재현 기자 |
지난해 개막 초반 KIA에는 반가운 낭보가 연속됐다. 우선 개막 초반 투수 한기주(31)가 4년 만인 1462일 만에 승리를 따내는 일이 있었다. 주목을 받으며 팀에 입단했지만 어깨, 팔꿈치, 손가락 등 수차례 부상을 겪으며 고생한 한기주는 뒷문을 막는 불펜투수로 변신해 다시 승리투수를 따낸 것. 4년 만이지만 당시 그가 느끼는 공백은 짧지 않았다. 그만큼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파이어볼러의 대명사였던 그는 아직도 부상과 싸우고 있다.
역시 지난해 개막 초반. 곽정철(32)은 긴 부상의 터널을 뚫고 1792일 만에 1군 무대에 복귀해 감동을 자아냈다. 베테랑으로서 KIA 마운드를 굳건히 지켜냈다. 한기주와 함께 개막 초반 활력을 불어넣기 충분한 활약을 펼쳤다.
다만 곽정철은 이내 혈행장애로 1군에서 말소됐다. 이후 1군과 2군으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당시 김기태 감독은 곽정철의 이런 모습에 “의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칭찬한 바 있다. 베테랑들의 연이은 변신 성공. 좀 더 길게 이어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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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C 불펜투수 원종현(사진)은 암을 이겨낸 현재도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뿌리고 있다. 사진=천정환 기자 |
그렇게 조용했던 황덕균은 지난해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를 넥센에서 얻고 묵묵히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던 9월 어느 날. 선발투수가 이르게 무너진 날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깜짝 역투를 펼쳤다. 그 사이 팀 타선은 힘을 냈다. 생애 첫 승리의 순간이 만들어진 것. 14년 만의 기적은 당시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2016년 KBO리그서 주목 받은 인상적 장면이 되기 충분했다.
▲아픔 이겨낸 의지
지난 몇 년 한화 마당쇠 송창식(32)은 리그를 대표하는 불펜투수로 성장했다. 실력 뿐 아니라 다른 화제도 많았다. 어느새 그는 대표적인 투혼의 불펜투수가 돼 있었다. 잦은 등판, 연이은 연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팬들은 송창식의 투혼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송창식은 이미 한 차례 인간승리의 기적을 만들어낸 바 있다. 2008년 훈련 도중 갑자기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지는 버거씨병(폐쇄성 혈전혈관염)을 앓으며 선수생활 최대위기에 놓였다. 야구선수로서 돌아오기 어려워보였다. 모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한화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인간승리 그 자체를 만들었다.
NC의 불펜에이스 원종현(31)은 암을 이겨냈다. 시원한 강속구로 NC 불펜의 핵 역할을 해내던 그는 이미 몇 번의 방출을 이겨내며 힘든 일들을 이겨낸 선수. NC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나 싶었으나 2015시즌을 준비하던 도중 대장암이라는 청천벽력의 판정을 받게 됐다.
원종현은 포기하지 않고 1년이 넘는 오랜 투병과 재활 과정을 이겨내며 작년 5월 건강한 모습으로 복귀했다. 강속구는 여전했다. 올 시즌은 더 진화한 모습으로 현재 팀 불펜 에이스 역할을 도맡고 있다. 암도 그의 강속구 본능을 막아내지 못했다.
암을 이겨낸 이는 원종현 뿐 아니다. 선배인 정현욱(40) 현 삼성 코치 역시 선수시절 막판 위암 판정을 받고 오랜 시간 병마와 싸웠다. 끝내 병을 이겨낸 그는 지난해 시범경기를 시작으로 1군에서도 다시 공을 던졌다. 얼굴은 많이 야위었지만 야구를 향한 열정은 그대로였다. 정현욱은 감동의 그라운드 복귀를 마친 지난해 말 현역은퇴를 선언하고 코치로 새 출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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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화 불펜투수 송창식(사진)은 앞서 병을 이겨내고 마운드에 복귀했다. 최근에는 투혼의 불펜투수 상징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사진(대전)=김영구 기자 |
시간을 거슬러 오래 전 과거로 올라가도 이러한 인간승리 스토리는 빠지지 않는다. 지난 1986년 한양대를 졸업하고 청룡에 입단했던 김건우(54)는 선린상고 시절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프로데뷔 첫 해에는 18승 평균자책점 1.81을 기록하며 신인왕에 오르기도 했다. 이듬해도 12승을 올렸다.
탄탄대로 같았던 그의 인생은 하지만 뺑소니 교통사고라는 좌절로 변화를 맞이했다. 대수술을 받고 힘겨운 재활을 이겨낸 뒤 기적 같이 재기했지만 투수로서 오랜 활약은 쉽지 않았다. 타자로 변신해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끝내 조기은퇴를 피하지 못했다. 현재는 평택 청담고에서 후진을 양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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