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기자] 어느 쪽일까 따져본다면 LG 유지현 코치(45)는 자랑에 서툰 편이다.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자신의 장점이나 잘한 일을 길게 잘 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선수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워낙 생글생글 웃는 낯이라 그런지 진지하게 자신감을 어필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랬던 그가 이달 초 ‘2016프로야구 스포츠서울 올해의 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코치상’을 수상한 뒤는 좀 달랐다. “10개 구단 코치라면 세 자리수를 넘기는 숫자인데 그 중에 선택이 됐다니 대단한 것 아니냐”며 솔직한 자부심을 표현했다. 많이 기뻤다고 했다. 사실 올해 슬픈 상(喪)이 있었다. 든든한 응원, 고마운 힘이 돼 주던 가족을 떠나보냈는데 “하늘나라에서 보내준 상인 것 같아” 뭉클함도 컸다.
![]() |
↑ LG 유지현 코치는 불안함을 딛고 성장한 LG의 2016년을 감사와 뿌듯함으로 정리하고 있다. 사진=MK스포츠 DB |
하긴 유 코치의 말을 빌자면 “어느 팀의 3루 코치가 누구인지 모를 때” 그 팀의 3루 코치는 가장 잘 하고 있다. 수훈의 득점 장면에선 결코 보이지 않는 그들. 오로지 실패의 순간에만 우리가 쳐다보는 자리이긴 하다.
“가장 불확실한 전망으로 시작했던 시즌이고 그만큼 가장 큰 보람을 안겨준 해”라고 2016시즌을 정리하는 유 코치는 그래서 더욱 이 해의 노력을 인정받은 평가가 감사하다.
“기량을 믿는 것과 결과를 확신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변화를 만들어야 할 선수들은 잠재력은 충분했지만, 아직 경험이 모자랐고 자신감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믿게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자기 확신이 충분하지 못하면 선수들은 안전주의에 머물게 된다”는 유 코치는 그런 선수들이 두려움을 걷고 리스크를 감수하는 과감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몰두했다. 두 발의 안정감, 넘어지지 않겠다는 조심스러움 대신 한 발을 들고 뛰쳐나가는 용감함이 필요한 때였다. LG에게 2016년은.
“결과가 나빴을 때 선수들이 위축되지 않고 실망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러면서 모험에 대한 두려움을 깨어나갔습니다.”
그래서 2016KBO 포스트시즌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LG-KIA의 와일드카드 결정전 2차전 9회 황목치승의 ‘깜짝도루’는 유지현 코치가 꼽는 “LG의 올해가 집약된 순간”이다. 0-0이던 9회 마지막 공격 무사 1루.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던 보내기번트 대신 1루 대주자 황목치승은 나오자마자 냅다 2루로 달렸다.
남들은 놀랐지만, LG에겐 “정말 많은 밑그림의 과정을 거쳤던 그림”이다. “우리에겐 무사 1루에서 번트를 대는 것보다 도루를 시도하는 것이 결국 한 점을 낼 확률이 더 높았습니다. 많은 훈련과 많은 실험을 했습니다.”
다만 2루에 안착할 확률은 번트가 높을 수밖에 없다. 당장 실패할 수도 있는 ‘폭망’의 위험은 도루 쪽이 무시무시했다.
“아무리 데이터에 자신이 있었다고 해도 결과를 모두 책임져야 할 양상문 감독님이 그 때 그런 선택을 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한 시즌의 마지막이 달렸던 절박했던 순간에 선수들을 믿어주셨습니다.”
![]() |
↑ LG 유지현 코치는 지난 8일 ‘2016프로야구 스포츠서울 올해의 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코치상을 수상했다. 사진=김재현 기자 |
양상문 감독이 시즌 내내 “많이 참아주셨다”는 유 코치는 “아쉬움의 표현도 거의 없었고 선수들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기다림의 대가로 LG의 젊은 선수들이 껍질 하나를 깨부수고 성장할 수 있었을지도.
플레이오프에서 패했지만 LG는 와일드카드 결정전부터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에 나서면서 이번 포스트시즌 출전팀 중 가장 많은 10경기를 치렀다. “달라진 LG가 가능성을 보여준 한해로는 넘치는 성과였다”고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 유코치지만 “내년이 더욱 중요하다”는 형세 판단은 놓치지 않고 있다.
LG의 가장 빛났던 우승 드라마, 1994년의 가장 신나는 기억인 ‘꾀돌이’ 유지현은 그해의 신인왕으로 출발해 10년 동안 LG의 ‘애지중지’ 스타였다. 톱스타 중에서는 현역을 일찍 떠난 편이라 코치 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12년째. 어느새 선수보다 코치로 LG 유니폼을 입은 시간이 길어졌다.
더 이상 스타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잘 느낄 때는 아들들과 대화할 때다. “일곱 살배기 막내아들(규연)은 오지환이 아빠에게 깍듯하게 인사할 때 신기해한다”고 웃는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가정을 꾸리고 2세를 키우면서 문득문득 아쉬움을 맛보는 순간이 그렇다. 그들이 그라운드에서 가장 빛나던 때를 아들과 딸들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23년 LG맨’ 유지현에게는 남들이 잘 모르는 보람이 있다. “제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오래오래 팬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큰 응원을 받고 있습니다.” ‘열정의 LG팬’들은 때론 과격한 표현도 서슴지 않아 꽤 부담스러운 컬러로 꼽히지만, 그 와일드함까지 유 코치는 ‘매력’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남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저는 LG를 사랑합니다.”
비단 3루 코치뿐일까. 사실 코치는 잘 보이지 않는 자리다. 12년 코치생활동안 자신감이 붙었다기 보다 깨달음이 늘었다. 결국은 그라운드의 주인공인 선수들이 해내야 하는 야구, 그들의 곁에서 ‘끝없이 믿음을 줄 수 있는 코치’가 돼야 한다.
“‘혹시’를 ‘역시’로 바꿨다”는 2016년 LG, ‘역시 LG’의 확신을 되찾은 이는 선수들만큼이나 코치 유지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
↑ 아빠의 선수 시절을 모르는 ‘꾀돌이’ 유지현의 둘째 아들 규연은 LG 오지환이 아빠 말을 잘 듣는 것을 신기해한다. 사진=유지현 코치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