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안준철 기자] 그 곳에 그들이 있었다.
1982년 출범 이후 34시즌. 연간 700만 관중의 한국 으뜸 프로리그로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선수들이 KBO의 성장과 감동을 채웠다. 그들 중에는 역사와 기록은 기억하지만 많은 팬들이 깜빡 잊어버리고 만 이름들, 추억 속에 묻힌 레코드 홀더들이 있다.
야구를 기다리는 2월의 MK스포츠가 지금 그라운드의 ‘슈가맨’들을 소환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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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작성한 해타 타이거즈 방수원. 사진=KIA타이거즈 제공 |
통산 197경기 599⅔이닝 18승29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75.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부터 1989년까지 8년 동안 뛴 한 투수의 기록이다. 그저 그런 평범한 기록. 이 투수는 8년 동안 딱 한 번의 완투와 완봉을 기록했는데, 그게 바로 노히트노런이었다. 그리고 그 노히트노런은 KBO리그 1호로 새겨졌다. 바로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방수원이 남긴 기록이다.
1980년대 해태는 왕조를 구축했다. 방수원도 원년 개막전 선발로 등판하는 등 왕조의 일원이었다. 그가 선수생활을 했을 동안 해태는 1983년 첫 한국시리즈 챔프에 오른 이후 5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방수원은 주연은 아니었다. 원년만 해도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등이 있었고, 이후 선동열, 조계현, 한대화, 이순철 등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방수원은 궂은일을 도맡았다. 그는 2이닝 정도 던지는 게 전부였다. 그런 그가 1984년 5월5일 사고를 쳤다. 이날 당시 최하위팀 삼미를 맞아 선발로 등판, 2이닝이 지나도 계속 마운드를 지켰다. 결국 9회까지 마운드를 지킨 그는 볼넷 3개와 탈삼진 6개로 프로야구 첫 노히트노런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는 “노히트노런보다 완투를 한 사실이 더 기쁘다”고 말했다. 자신을 2이닝 투수로만 봤던 것에 대한 한풀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4시즌 방수원의 성적은 1승8패로, 노히트노런이 없었더라면 승리 없는 시즌을 보낼 뻔 했다.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고도 선발투수 보다는 1~2이닝 짧게 던지는 역할을 했다.
사실 첫 노히트노런의 영광을 안았지만, 방수원은 국보급 투수 선동열과의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선동열에게 슬라이더를 전수한 자가 바로 방수원이기 때문. 비록 평범한 선수생활 중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첫 노히트노런밖에 없지만. 프로야구의 역대 최고의 신스틸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jcan1231@mae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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