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美 애너하임) 김재호 특파원] “안녕하세요.” 낯설지 않은 한국어 인사말과 함께 악수를 청하는 그의 모습에서 친근함이 느껴진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프로야구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며 현대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했던 투수 미키 캘러웨이(40). 그는 현재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투수코치로 성공적인 ‘인생의 후반전’을 보내고 있다.
지난 5일(한국시간) LA에인절스와의 원정경기가 열리는 에인절스타디움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현역 생활의 마지막 3년을 불태웠던 한국에서의 추억을 꺼냈다.
대구탕이 제일 그리워요
“음식이 제일 그립다. 대구탕을 제일 좋아했다. 매운 생선 수프인데 맛이 정말 좋았다.”
한국 음식하면 겨우 ‘코리언 바비큐’ 정도를 말하는 다른 미국인들과 달랐다. 그만큼 그는 한국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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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러웨이 클리블랜드 투수코치는 한국에서 보낸 3년이 코치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美 애너하임)= 김재호 특파원 |
그는 고등학교 시절인 1992년 굿윌 게임 대표로 선발, 한국에 방문한 경험이 있었던 그는 “한국에 처음 갔을 때는 그곳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다. 도착해서 정말 한국 생활을 즐겼다. 강남이 인상적이었다.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며 다시 한 번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한국 야구, 앞선 기술과 열정에 놀랐다
그는 한국에서 좋은 추억만 남긴 것이 아니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며 70경기에 등판, 419 2/3이닝을 던지며 32승 22패 평균자책점 3.56의 성적을 기록했다. 좋은 성적을 남겼음에도 모기업 사정으로 사라져야 했던 유니콘스의 마지막을 장식한 투수였다.
신인 시절 그와 한 팀이었던 강정호(28·피츠버그)는 “경기를 항상 이기고 싶어 하는, 승부욕이 강한 선수였다”며 현대 유니폼을 입은 캘러웨이를 기억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이기고 우승하기 위해 한국에 간 것이었다”며 승부욕이 강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모든 팀원들이 똑같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며 당시 한 팀으로 뛰었던 동료들의 승부욕을 기억했다.
그가 한국야구에서 놀란 것은 두 가지. 첫 번째는 뛰어난 기술이었다. “기술력이 굉장히 놀라웠다. 더그아웃에서 경기 도중 매 이닝 히트 맵(heat map)을 보며 상대 타자를 연구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최근에서야 도입한 것을 한국에서는 그때부터 활용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앞서 잠시 언급했던 승부욕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승부에 대한 강한 열망을 봤다. 시즌 내내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훈련도 정말 열심히 했다. 스프링캠프 기간은 이곳에서 하던 것의 두 배였고, 훈련도 하루에 세 번씩 했다. 다들 진지하게 열심히 훈련했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그는 이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며 3년간 아쉽지 않은 성적을 남겼다. 그는 “통역을 맡았던 대니 엄(엄홍 대리)이 정말 잘해줬다. 나와 가족들이 집에서 보내는 것처럼 편안하게 대해줬다. 나도 팀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예를 들면 나이 많은 선수가 방에 들어오면 일어나서 인사를 하거나-을 보여주며 팀원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려고 했다. 선수들도 나를 매우 반기고 잘 대해줬다”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성공비결로 꼽았다.
딱 한 가지, 그가 아쉬웠던 것은 타 구단에 비해 썰렁한 경기장이었다. 당시 인천을 떠나 수원을 연고지로 했던 현대는 좋은 성적에도 그에 걸맞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팀이었다. 그는 “당시 현대는 훌륭한 팀이었다. 매니저 킴(김재박 감독)이 팀을 여러 차례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팬층이 이를 받쳐주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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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러웨이는 클리블랜드 투수코치로 활약중이다. 선수 시절 피우지 못한 재능을 코치로서 만개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AFPBBNews = News1 |
한국에서 3년, 코치 생활의 밑거름
캘러웨이는 고등학교 시절인 1992년 테네시주 올해의 고교 선수로 선정될 정도로 인정받던 유망주였다. 1996년 드래프트에서 7라운드에 탬파베이 레이스에 지명, 프로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5시즌 동안 40경기에 등판하는데 그쳤다. 현대에서 뛴 이후 2009년 대만 프로야구에서 1년을 보낸 뒤 은퇴했다.
선수 생활은 빛나지 못했지만, 지도자 경력은 달랐다. 2008년 텍사스 A&M에서 임시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그는 지난 2010년 인디언스 구단에 합류, 레이크 카운티 캡틴스, 킨스턴 인디언스 투수코치를 거쳐 2012년 마이너리그 피칭 코디네이터로 승격했다.
2013년부터는 메이저리그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가 이끈 클리블랜드 투수진은 2014년 1450개의 탈삼진을 잡으며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기록을 세웠다. 2012년 4.78이었던 팀 평균자책점은 2014년 3.56까지 떨어졌다.
선수 시절 피우지 못한 꽃을 코치로서 피우고 있는 그는 한국에서 보낸 3년이 코치 생활에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 팀에는 도미니카 공화국, 대만 등 여러 나라에서 온 투수들이 있다. 그때 경험을 통해 이들이 미국에서 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해하고, 이들의 적응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이어 “어느 한 사람만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장점을 모두 보고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기서 이 경험, 저기서 저 경험한 것들을 모두 모았다. 한국뿐만 푸에르토리코, 대만 등에서 보고 배운 것을 모아 나만의 성공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10년 전 자신처럼 한국 무대를
“한국에서 당신을 찾은 것은 그만큼 좋은 투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여기에 통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경치나 음식, 연장자에 대한 존경 등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즐길 것을 권한다. 그곳은 멋지고 평화로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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