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판 위에 서서 마주보는 이승엽(39·삼성)은 정말 위압감이 느껴지던 타자다.
‘걸리면 홈런…’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투수는 바짝 긴장하게 된다. 투수가 긴장한다는 것은 실투의 확률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실투란 무엇인가. 공이 몰리는 것이다. 공이 몰리면? 타자가 치기 좋은 볼이다. 이래서 장타력을 가진 타자의 위압감은 영원히 강력한 무기다.
투수가 ‘장타’에 대해 느끼는 압박감은 투수가 아니면 잘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다. 중요한 장면에서 많은 투수들은 ‘4할 교타자’보다 ‘2할 홈런타자’가 더 만나기 싫다. 그 승부의 결과가 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 존에 들어오면 주저없이 배트가 나오는 이승엽은 어렵지만 짜증나는 타자는 아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맞선 승부의 결과를 깨끗하게 승복하게 만드는 뒷맛 깔끔한 상대다. 사진(잠실)=천정환 기자 |
사실 ‘몸쪽 공’이라는 이승엽의 ‘약점 존’은 참으로 좁은 구간이다. 스트라이크로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 거기는 장타 존이다. 당연히 몸에 맞혀도 안 된다. 즉 과감한 몸쪽 공을 볼로 컨트롤할 수 있는 담력과 제구력이 탄탄하게 뒷받침돼야 바로 이승엽을 잡는 ‘몸쪽 공’을 던질 수 있다. 이 몸쪽 공을 집요하게 던져대면서 이승엽의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게 그와 맞서는 최선의 공략법이라고 생각된다.
선수 시절, 이승엽과 마주했던 가장 기억나는 승부는 2000시즌의 어느 잠실 경기다. 이승엽도 전성기였지만, 나도 투수로서 힘이 넘치던 때다. 당시 주무기 커브는 ‘(타자에게) 가르쳐주고 던져도 못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스스로 확실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첫 타석의 이승엽에게 ‘제대로 들어갔던 커브’를 얻어맞았다. 레프트 펜스를 때리는 큼직한 2루타였다. 당시 나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2루타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타석의 이승엽에게 또 커브를 던졌다. 나의 주무기는 이번에도 제대로 들어갔지만, 이승엽은 그 공을 다시 받아쳤고 이번엔 백스크린의 기둥을 맞혀버렸다. 엄청나게 큰 홈런을 맞고 서야 앞 타석의 2루타 역시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힘과 힘으로 맞붙어서는 안 되는 타자였던 거다.
이승엽과의 승부는 그보다 훨씬 뒤, 체인지업으로 속도를 조절하고 많이 느린 슬로우 커브를 던지게 되면서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 같다. 타이밍을 빼앗는 승부가 훨씬 잘 먹혔다.
마흔의 이승엽은 아무래도 빠른 공에 대한 대처에서 예전과 같을 수 없다. 지금의 그에게는 느린 볼을 섞어 던지면서 속구의 느낌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볼배합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다만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은 ‘맞으면 홈런’이 될 것 같은 느낌, 악착같이 정타를 피해야 하는 장타자, 예리한 제구력을 시험해야 하는 상대라는 점이다.
투수에게 이승엽은 두려운 타자지만, 짜증나는 타자는 아니다. ‘공략법’이 있는 타자이고, 자신의 존에 들어오면 주저 없이 휘둘러주는 타자다. 이겼을 때도, 패배했을 때도 깔끔하게 승복하게 하는 매력 있는 상대다.
투수판을 밟고 바라볼 때나, 이제 마이크 앞에서 지켜볼 때나, 그는 여전히 감탄을 자아내는 좋은 선수다. 이승엽 같은 타자에 맞서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겨뤘던 승부는 결과와 상관없이 좋은 기억이 된다.
그가 지금 KBO 첫 통산 400홈런 대기록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우리 모두가 두근두근 기다리는 순간이 바로 한발 앞이다
어깨가 무거운 이승엽 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승부를 펼쳐야하는 그와 맞설 투수들에게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 내가 던진 최선의 공 하나에 최고의 응답을 해줄 타석의 ‘살아있는 전설’을 믿고 씩씩한 승부구를 던져주기를…. 잡아도, 맞아도, 좋은 승부의 기억으로 남을테니까. (SBS스포츠 프로야구 해설위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