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가을, 일본 교토 가쓰라고교 야구부에서 생애 첫 마운드에 올랐던 1학년 투수 가네바야시 세이콘은 ‘자이니치’였다. 그는 1959년 재일교포학생야구단에 선발되면서 처음 ‘김성근’으로 불렸고, 2년 뒤 대만에서 열렸던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서 첫 태극마크를 달았다.
재일교포팀에 뽑혀 처음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도, 한국 실업팀에 입단할 때도, 그리고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영주 귀국할 때도 그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번번이 걱정하고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야구 밖에 몰랐던 가쓰라고교의 재일한국인 투수는 50여년 후 한국프로야구에서 가장 열렬한 사랑과 가장 뜨거운 시샘을 한몸에 받는 프로야구 감독이 된다.
김성근 감독(73·한화)의 옛날 앨범 속에서 설렘과 어색함, 기쁨과 영광으로 기록된 '조국'의 추억을 찾았다.
[편집=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기자]
↑ ‘한국인 김성근’의 시작에는 교토 가쓰라고교 야구부의 가네바야시 세이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이 있다. 3학년때 고시엔 예선에서 빼어난 활약을 하면서 재일교포팀에 뽑힐 수 있었다. |
↑ 1959년 재일교포학생야구단의 전국순회 경기에 대해서 김감독은 감동과 설움의 기억을 함께 갖고 있다. 열광적인 환호와 찬사를 받았지만, 관중석에서 들려오던 ‘쪽발이’라는 연호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
↑ 실업야구 교통부 시절인 1961년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대만)에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던 것을 김감독(오른쪽 첫번째)은 벅찬 감격으로 기억한다. 당시 김응용 백인천(오른쪽에서 세번째)도 함께 뛰었다. 한국이 준우승했던 대회다. |
↑ 김감독은 1975년 서울에서 열렸던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대표팀 코치로 참가한다. 한국이 우승했고, 선수단은 모두 정부 포상을 받았다. 김감독은 ‘기린장’을 받았다. |
[사진제공=김성근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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