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기자] “선수때 예고 홈런은 못쳐봤지만, 감독이 된뒤 예고 작전은 일상이죠.”
넥센 염경엽 감독(46)이 생각하는 작전 성공률의 가장 중요한 키는 감독의 임기응변이 아니라 선수들의 작전 이해도다.
염감독의 첫 작전 지시는 지금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아니라, 차차기 타자에게 내려진다. 그가 대기타석 써클로 이동하기 위해 더그아웃 벤치에서 일어나 감독의 앞을 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이다.
“지금 타자가 안타를 치고 나가면, 나는 다음 타자에게 번트를, 이후 너를 믿을 거야.”
“앞선 두명 중에 누가 출루하면, 나는 너에게 런앤히트 사인을 낼 거야.”
예고를 들은 선수는 두 타자 이후 닥칠 상황, 자신이 맡을 역할을 예습할 수 있다. 이렇게 ‘준비된 타자’들을 타석에 세우기 위해 감독은 매순간 두 세수 앞을 계산해야 한다. 도무지 살찔 틈이 없어 보였던 바쁜 사령탑, 염감독의 경기는 늘 그랬다.
극히 드물지만 ‘예고 작전’에 타자의 눈빛이 흔들릴 때가 있다. 컨디션, 혹은 자신감의 문제? 그럴 땐 작전, 또는 타자를 바꾼다. 강행은 답이 아니다.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독의 전술보다 선수들의 준비정도입니다.”
많은 선택에서 “경기의 상황 보다 선수의 상황”을 고려한다. “작전 때문에 누군가의 슬럼프가 와선 안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감독의 입장, 상황의 유혹에 집착하면서 선수를 소홀히 보다가 장기적인 손해로 이어지면 치명적”이라는 그가 점수를 못내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팀의 운영에 생기는 변수다. 한 경기속 계산만큼 한 시즌, 다음 시즌에 대한 설계가 부지런한 스타일이라 더 그렇다.
돌아보면 시즌 절반의 반환점을 돌던 무렵까지 2위 NC에 5게임차 이상 떨어져있었다. 6월까지 4위 자리도 들락거렸고 NC를 따라잡은 건 7월초가 되어서였다. 그러나 넥센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기어이 삼성의 승수를 따라잡고 반게임차 2위로 시즌을 마쳤다.
사람들은 올해 넥센의 성공 비결로 염감독이 기용했던 많은 선수들, 많은 작전들을 말하지만, 염감독이 스스로 꼽는 올해 그의 최고 한 수는 ‘쓰지 않았던’ 선수다. “7월까지 조상우를 쓰지 않았던 게 가장 잘한 일 같습니다.”
5월초 부상 이탈했던 조상우를 충분히 기다렸다가 썼다. 그는 후반기 승률 1위 레이스의 일등공신이 됐다.
8월말 주포 강정호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경과는 애매했지만, 염감독은 채근 대신 오래 참고, 기다리고, 또 뺐다. 사령탑 11년차인 NC 김경문 감독은 “내가 2년차에 염감독처럼 대범했을까 확신이 없다”면서 “발탁하는 것보다 (주전을) 빼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고 후배 감독의 담대함에 놀라워했다.
염감독은 사실 담대함과 전혀 딴판인 모습도 갖고 있다. ‘염갈량’을 완성하는 치밀한 디테일의 근본, 경기에 대한 ‘뒤끝’이다.
“잔소리꾼이죠. 끝나고 코치들한테 아주 시시콜콜 다 지적합니다. 그냥 넘어가는 게 없어요.”
시즌 내내 시도 때도 없는 ‘밤샘 복기’의 의혹을 샀다. 스스로 인정하는 ‘돌려보기의 달인’이다.
귀가해서도 야구다. 부인에게 편안한 남편이 못돼 주었을지도 모른다. “자꾸 잠꼬대를 한다고 그러더군요. 주로 경기가 안풀렸던 날, 자면서 그렇게 화풀이를 한다고...”
염감독이 가장 인간미를 보일 때는 ‘딸바보’ 아버지의 모습일 때다. 김성갑 넥센 2군감독의 ‘스타’ 딸 유이가 부럽지 않을 만큼 예쁜 딸은 음악을 한다. 장르가 꽤 생소할 만한데도 염감독은 딸이 작업하는 미디음악을 관심있게 들어줄 만큼 따뜻한 아빠다.
↑ 코치들에겐 "잔소리꾼"이라는 염경엽 감독은 선수들에겐 혹독한 사령탑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훈련량도 많은 편이 아니다. 사진=MK스포츠 DB |
현대에서 1차례 준우승, 4차례 우승했던 김재박 감독은 “맨 마지막 순간에 패자로 남는 2등이 가장 싫다”고 했고, 두산에서 세차례 KS를 패했던 김경문 감독은 “시리즈를 지고나면 준우승도 잘했다는 인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2등은 가장 억울한 자리”라고 했다.
그 아픔이 이 가을엔 염경엽 감독의 몫이었다.
평소 크게 표정변화가 없는 차분한 벤치였던 그가 지난 11일 올해의 마지막 승부, 한국시리즈 6차전을 패한뒤 눈물을 보였다.
마치 어느 노래 가사 같았던 그림.
‘달랑 한 경기 졌을 뿐인데도
그 많고 많았던 날들이 한꺼번에 생각나다니...‘
그에겐 1할타자였던 선수 시절이 있고, 현장의 꿈을 접어야 했던 프런트 시절이 있다.
감독 염경엽의 성공 사례를 보고 감독 재목이 프런트를 거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러나 정작 염감독은 동의하지 않는다. “지도자를 목표로 하면 계속 현장에서 코치로 성장하고 감독
“6차전이 끝나고 나니 그 모든 순간들이 갑자기 막 떠오르더라고요.”
정말 이기고 싶었던 그는, 정말 많이 노력했던 지도자다.
응달의 서늘함을 알아 햇볕의 따뜻함이 절절한 사령탑. 냉철한 승부수만큼 뜨거운 눈물 한방울도 어울렸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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