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시즌 중이었다. 대구 출장길에 류중일을 비롯한 몇몇 삼성 코치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당시 삼성 사령탑은 김응용 감독. 식사 자리에서 막내였던 류 코치는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3루 주루코치 정말 못 하겠어요. 감독님 얼굴만 보면 몸이 굳어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빈 말이 아니었다. 류중일 코치는 스트레스 성 탈모에 시달릴 정도로 엄청난 중압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실제 몇 차례 주루미스로 주자를 홈에서 횡사시키기도 했다. 주자가 홈에서 아웃되면 일반적으로 그 책임은 3루 코치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3루 코치는 ‘잘 해야 본전’이란 말이 있다.
↑ 정규시즌 4연패를 달성한 류중일 삼성 감독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대구)=김재현 기자 |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오기 전까지 이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같이 야구를 해본 적이 없다. 김응용 감독이 한일은행과 국가대표 사령탑을 맡았을 때 류중일 코치는 중학생이었다. 김응용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를 지휘할 때 류중일 코치는 삼성 선수였으니 감히 말을 섞거나 친분을 나눌 사이가 아니었다.
류중일 코치의 머릿속에 있는 김응용 감독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호랑이 같이 무서운 성격 그리고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뭐 이런 것이었다. 이런 감독이 덕아웃에 떡하니 앉아 쳐다보고 있는데 초짜 코치가 3루에 나가 있으려니 몸이고 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몇 차례 명백한 실수를 했는데도 김응용 감독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류중일 코치가 머리를 조아리고 김응용 감독 앞으로 가면 고개를 획 돌리고 말았다. 차라리 호통이라도 치면 속이 편할 텐데 모른 척 하니 속이 타 들어갔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건 실수 연발의 류중일에게 3루 주루코치를 계속 맡겼다는 사실이다. 류중일 코치의 부담감은 커져만 갔다.
김응용 감독의 생각은 이랬다. “삼성에 류중일 만큼 센스 있게 야구를 한 선수가 누가 있냐? 지금은 덤벙대기도 하고, 오버도 하지만 갈수록 안정될 것이다. 스스로 깨우칠 때가 있을 것이다.” 김응용 감독은 비록 류중일 코치와 한솥밥을 먹어 본 적은 없지만 그의 가치는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고 기다렸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 때 류중일 코치가 포기했더라면.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2군에 내려갔더라면. 김응용 감독이 실수투성이의 류중일 코치를 내쳤더라면.
류중일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큰 획을 그었다. 김응용 김성근도 못한 정규시즌 4연패를 이뤄냈다. 류중일 야구의 핵심은 ‘믿음’이다. 시즌 전 구상을 특별한 돌발 변수가 없는 한 바꾸지 않는다. 한 번 믿은 선수는 시즌 끝까지 간다.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과가 정규시즌 4연패로 나타났으
선수시절 류중일은 재기 넘치고, 화려한 플레이가 돋보였다. 이런 류중일이 감독 부임 이후 진중하고 믿음의 야구로 선수들에게 다가 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01년 그 때 머리카락이 빠져 가며 김응용 감독한테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경닷컴 MK스포츠 편집국장 dhkim@mae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