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인천) 이상철 기자] 아시안게임 개막 전만 해도 이광종호를 향한 시선은 매우 차가웠다. 안방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28년 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도전하겠다고 자신있게 외쳤지만 기대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2010년의 홍명보호, 2006년의 베어벡호, 2002년의 박항서호, 1998년의 허정무호까지. 화려한 스타플레이어로 가득했던 지난 아시아경기대회 축구대표팀과 비교해 인기와 전력이 처진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인천에서 열리는 홈 이점을 빼고는 상대를 압도할 만한 힘이 모자라다는 평이었다.
준비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 아시아경기대회의 전초전으로 여겼던 지난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U-22 챔피언십에서 4위에 그쳤다. K리그 클래식 및 챌린지 비시즌에 열렸다고 하나 내용도 지지부진했다.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 개최 기념으로 펼쳐진 지난 6월 쿠웨이트와 평가전에서도 문제를 드러내며 무승부를 거뒀다.
↑ 한국은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남자축구 결승에서 북한을 꺾고 우승했다. 28년 만에 수확한 값진 금메달이었다. 사진(인천)=한희재 기자 |
이전 대표팀과 비교해 큰 경기 경험도 많지 않았다. A매치를 1경기라도 뛰었던 선수는 20명 가운데 6명에 불과했다. 월드컵 출전도 김신욱(울산), 박주호(마인츠), 김승규(울산) 등 와일드카드 3명 밖에 안 됐다.
때문에 ‘냉대’를 받았던 이광종호다. 더 강했고, 더 잘 나가는 선수들이 많았을 때도 오르지 못한 정상이었다고. 조별리그에서 3연승으로 A조 1위에 올랐지만 믿음은 좀처럼 쌓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력 부진으로 비판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러나 토너먼트 들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16강 홍콩전과 8강 일본전에서 골이 참 늦게 터지긴 했지만 단단한 수비를 바탕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준결승에서는 28년 만에 골을 넣었다. 준결승 골이 터지는데 1986년 서울 대회 준결승 인도네시아전 후반 22분 이태호의 골 이후 무려 574분이 걸렸다. 그렇게 결승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다.
연전연승에 들끓었던 여론은 잠잠해졌다. 연장 후반 14분에 터진 임창우(대전)의 극장골이 터져 마든 결승 북한전 승리로 정점을 찍었다. 태극전사의 골에 환호했고 기뻐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우승 세리머니를 사반세기를 넘어서야 보게 됐다. 그 꿈을 이룬 이광종호를 ‘환대’했다.
그동안 한국을 괴롭혔던 모래바람을 피하는 행운이 따르기도 했지만 실력으로 모든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은 토너먼트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이광종호는 한국축구의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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