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日 도코로자와) 김원익 기자]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뛰고 있는 한국인 투수 김무영(28)은 최근 몇 년 사이 함께 야구를 하는 3명의 한국인 형님이 새로 생겼다. 바로 ‘코리안 특급’ 박찬호(41)와 ‘빅보이’ 이대호(32), 그리고 이대호의 통역을 맡고 있는 정창용(36) 매니저다.
우상이었던 박찬호가 2011년 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하면서 꿈만 같았던 인연을 맺게 됐다. 같은 해 이대호도 오릭스에 진출하면서 든든한 형님이 생겼다. 이대호가 올해 소프트뱅크로 이적하면서 정창용 매니저까지 3명의 부산 출신의 남자들이 한솥밥을 먹게 됐다.
↑ 박찬호는 김무영의 오랜 우상이다. 2009년 소프트뱅크 입단 당시 61번이 비어있다는 걸 알게 되자 두 말 없이 그 번호를 골랐고, 6년째 함께 하고 있다.사진(日 후쿠오카)=한희재 기자 |
이대호가 팀에 합류해 구단의 관심이나 미디어의 관심도 부쩍 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좋은 것은 가슴속 깊은 곳에 있어 몰랐던, 그리고 굶주렸던 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김무영은 “(이) 대호 형님이 우리 팀에 와서 너무 좋다. 함께 운동도 하고 조언도 받고, (정)창용이 형까지 3명이서 즐겁게 운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면서 “사실 내가 (이)대호 형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한국 언론하고 인터뷰 할수나 있겠나. 작년에도 MK스포츠와 인터뷰한 것도 그렇고 (이)대호 형이 있어서 관심을 받게 된 것 같다. 그리고 형님이 항상 잘 챙겨줘서 정말 좋다”며 활짝 웃었다.
김무영은 16세때 혈혈단신으로 대한해협을 건너올 당시 제대로 된 일본어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낯선 환경 속에서 학업과 야구를 새롭게 배워야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야구는 꿈도 꾸지 못하고 공부에 매달려야 했던 날들. 해가 뉘엿뉘엿 쥐고 나서야 겨우 글러브와 공을 잡았던 날들을 거쳤다. 그렇지만 김무영의 소속팀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가슴속에 품었던 고시엔 무대를 밟겠다는 꿈도 언감생심이었다.
↑ 고난을 겪으며 강해졌다. 사진(日 도코로자와)=한희재 기자 |
김무영의 말대로라면 “매일 국수와 라면만 끓여먹는 눈물겨운 날들”이었다.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월급으로 연습장비를 사고 숙식을 해결해야 됐다. 김무영은 사회인이 되었기에 차마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못했고, 김무영의 부모는 그런 아들을 지켜보며 애끓는 마음에 매달 라면박스를 택배로 부쳤다. 후쿠오카 레드워블러의 마무리로 2승 17세이브 평균자책점 0.41의 성적을 낸 김무영은 드디어 2008 신인드래프트서 소프트뱅크의 지명을 받고 프로의 꿈을 이룬다.
꿈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온 지 약 10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그리고 2009년 3월에는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주고 뒷바라지해준 일본인 부인 오이케 마이씨와 혼인신고도 올렸다. 이후 5세와 3세의 두 아들을 둔 행복한 가장이 됐다. 최강 소프트뱅크 계투진의 일원으로 3년 연속 개막 엔트리에도 포함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허전함이 있었다. 김무영은 주위의 수많은 조언과 회유에도 국적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렇게 가슴속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항상 그리워하고 있는 김무영이다. 이대호가 소프트뱅크로 이적한 이후 가장 좋은 점을 묻자 김무영은 “정말 든든하고 좋다. 이제 일본 생활도 적응도 되고 해서 외롭거나 그런 것은 없는데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아마 정에 많이 굶주렸었나 보다. 형님이 정말 잘 챙겨주신다”라며 활짝 웃었다.
↑ 김무영에게 이대호는 한팀의 동료를 넘어 든든한 고향의 형이다. 사진(日 센다이)=한희재 기자 |
지난해 제대로 된 4번타자가 없어서 고전했던 소프트뱅크였다. 이대호의 합류는 ‘형님’의 존재가 생긴 것에 더해 든든한 ‘우군’도 가세한 셈이었다. 김무영은 “이렇게 부산 사나이들이 뭉치게 됐다. 이 멤버라면 당연히 우승이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당연히 우승을 할 것이다. 2011년 우승을 하면서 반지도 받았다. 기분이 정말 좋더라. 또 우승을 하고 기분 좋게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정 매니저도 김무영의 든든한 우군이다. 김무영과 취재진 옆을 지나가던 정 매니저는 “우리 (김)무영이 기사 좀 많이 써달라. (이)대호보다 더 많이 써줘야 한다”며 장난스레 취재진을 협박(?)하기도 했다.
그런 김무영에게 ‘우상’ 박찬호는 또 다른 특별한 존재다. 바로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등판하는 모습을 보면서 야구선수의 꿈을 키운 ‘박찬호 키드’이기 때문. 그리고 낯설고 척박한 외국에서 야구에 도전했다는 동질감도 있었다. 그렇기에 김무영의 등번호는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상징과 같은 61번이다. 소프트뱅크에 입단하던 당시부터 고수하던 번호.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입단을 하니까 내 담당을 했던 스카우트가 ‘너는 당연히 61번이지? 61번이 비어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까 구단에서도 (박)찬호 형님에 대해서 알고 있더라. 그래서 ‘외국인선수가 61번을 안 달면 이 번호는 무조건 너한테 주겠다’고 약속했고, 외국인 선수들이 61번을 운 좋게 안 달면서 2009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 번호를 쓰고 있다. 내게는 의미가 있는 번호다. 누가 아무리 바꾸라고 해도 절대 안 바꿀 것이다. (박) 찬호 형님도 처음에 미국에 가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나. 그 고생을 한 것을 나도 배워야지 해서...”
2011년 박찬호가 일본리그에 진출하면서 맺은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김무영은 “(박)찬호 형님이랑 지금도 가끔씩 연락을 주고 받는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문자로도 물어본다. 그럴때마다 (박)찬호 형님이 격려도 해주고 조언도 많이 해주신다. 대호형도 도움을 많이 주지만 아무래도 타자다 보니까 그런면에서 같은 투수이고 대선수인 (박)찬호형님한테 많은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워낙 경험이 많은 분이다보니 멘탈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해서 어려울때나 안좋을때마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럴때면 좋은 글들도 보내주시고 그런다”며 ‘우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 김무영의 꿈과 도전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사진(日 도코로자와)=한희재 기자 |
“운동을 할 때는 즐겁게 하는 것이 나의 신조다. 내 성격이 그런편이다. 하지만 늘 웃으면서 즐겁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야구 선수로서의 나의 목표를 묻는다면 아무래도 지금은 구원투수를 하고 있으니 마무리 투수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이고, 또 만약 선발을 맡게 된다면 마운드에서 10승 이상을 할 수 있는 투수가 되고 싶다.”
숱한 고난이 김무영을 좌절하게 했을까. 그는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이렇게 야구를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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