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그 사고만 없었더라면….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지만 이 남자에겐 그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다.
황규봉. 그는 고교 최고 투수였고, 대학 최고 투수였다. 그리고 실업 최고 투수였다. 프로 원년 다승 2위, 1983년 구원 1위는 그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다. 그의 야구 인생이 못내 아쉬운 건 너무도 가혹한 사고후유증 때문이다.
1972년, 경북고 3학년 황규봉은 단연 고교랭킹 1위였다. 경북고 동기생 이선희가 그의 그늘에 가려 백업에 머물렀다. 우람한 체격에 묵직한 강속구는 ‘초고교급’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고려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 1학년 때부터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의 천재성이 신의 질투라도 받은 것일까. 그의 앞길에 그런 재앙이 다가올지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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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황규봉은 최연소 국가대표로 장도에 올랐다. 하지만 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한국팀 숙소에 화재가 일어났다. 3층에 묵고 있던 황규봉은 불길을 피하려고 창문으로 뛰어 내렸다. 허리를 크게 다쳤다.
이날 사고 이후 황규봉은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치료기간만 꼬박 2년이 걸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외상이 아니었다. 3층에서 뛰어 내린 후유증으로 고소공포증과 협심증에 시달렸다.
황규봉이란 이름이 서서히 잊혀 져 가던 즈음이었다. 1976년이었다. 대학 4학년이 된 황규봉이 거짓말처럼 마운드에 나타났다. 강속구의 위력은 더욱 무서워졌다. 다시 황규봉 주변에 불빛이 쏟아졌다.
황규봉은 1977년 신생팀 한국화장품에 입단했다. 동기생 김재박 정순명 김유동 김호인 심재원 김일환 박종회 조흥운 등과 함께 한국화장품을 난공불락의 팀으로 만들었다. 1977년 한국화장품과 연세대의 백호기 1회전 충돌은 그해 최고의 빅카드였다.
당시 연세대는 대학야구 4관왕이었고, 한국화장품은 실업야구 정상이었다. 선발투수는 연세대 1학년 최동원과 한국화장품 에이스 황규봉. 결과는 6-4로 이긴 황규봉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이 경기 뒤 각 신문은 “최동원이 황규봉에 무릎을 꿇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해 실업야구 다승왕과 방어율왕에 오른 황규봉은 4년 만에 다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하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악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원정길 중 비행기 안에서 고소공포증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다시 암흑기가 시작됐다. 황규봉은 팬들 곁에서 사라졌다.
지긋지긋한 트라우마와의 싸움은 계속됐다. 그리고 황규봉은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1979년 그는 악착같이 마운드에 섰고 보란 듯이 실업야구 방어율 1위를 탈환했다.
1980년, 그는 세 번째로 국가대표에 뽑혔다. 그를 괴롭혔던 고소공포증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났다. 고질적인 허리부상과 반복된 공백으로 구위는 예전만 못했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공을 뿌렸다.
황규봉은 삼성 라이온즈 창단멤버로 프로야구에 합류했다. 첫 해 15승을 거둔 황규봉은 삼성의 에이스였다. OB 베이스와의 한국시리즈가 열렸다. 시리즈 전적 1승1무1패에서 맞은 4차전. 운명의 여신은 얄궂게도 황규봉을 외면했다.
4-4인 7회초 2사 2,3루였다. 김우열이 친 공이 투수 머리 위로 치솟았다. 황규봉이 타구의 낙하지점을 향해 걸어 나오면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공이 글러브에 들어가는 순간 눈앞에 불꽃이 번쩍였다. 포수 이만수와 충돌하면서 공을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한 점을 헌납한 황규봉은 넋을 잃었고, 이후 신경식에게 볼넷, 김유동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아 졸지에 4-7이 되면서 경기를 내줬다.
이날 황규봉의 실책 하나는 한국시리즈 물줄기를 OB쪽으로 뒤바꿔 놓았고, 한국 프로야구 역사 또한 뒤바뀌었다.
황규봉은 1986년 한 많고, 사연 많은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잠시 삼성 투수코치를 한 황규봉은 야구계를 완전히 떠났다. 유니폼을 벗은 뒤 그를 야구장에서 본 사람은 없다.
다시 한 번 미련
우리는 황규봉을 더 오랫동안 야구장에서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매경닷컴 MK스포츠 김대호 편집국장 dhkim@maekyung.com]
사진제공=장원우 전 주간야구 사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