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과 박철순은 당대 최고의 투수코치와 투수로 만났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김성근은 명망 높은 투수 조련사로, 박철순은 미국야구를 체험한 에이스로 OB 베어스에 합류했다.
박철순은 한국 프로야구의 첫 번째 영웅이었다. 그는 22연승의 대기록 포함, 24승 4패의 빛나는 전과를 올리며 팀을 원년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이런 박철순을 뒤에서 묵묵히 끌어준 사람이 김성근 투수코치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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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83년 초, 동계훈련 중 찍은 것이다. 원년 우승 뒤 맞는 첫 동계훈련이라 함박웃음이 절로 나지만 얼마 뒤 김성근 박철순 둘 다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친다.
챔피언의 후유증은 너무도 혹독했다. 허리통증을 없애기 위해 국부주사를 맞으며 한국시리즈에 등판한 박철순은 그 뒤 처절하게 무너졌다. 재기와 좌절을 거듭한 박철순은 1996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10승 고지를 밟지 못했다.
김성근은 그 때를 회고하며 “1982년 한국시리즈 최종전이었던 6차전엔 박철순 등판을 끝까지 말렸어야 했다. 두고두고 후회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박철순은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 전장에 목숨을 내던지는 전사와 같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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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이 부상과의 기나 긴 싸움을 벌이는 동안 OB 역시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시기 OB 사령탑이 김성근이었다. 김성근은 1984년 OB 감독을 맡아 1988년 시즌 중 물러났다. 그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OB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게 전부였다.
박철순의 영향이 컸다. 박철순은 1984년과 1988년엔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으며, 1983년 4경기, 1985년 9경기, 1986년 13경기, 1987년 5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궁합이 안 맞았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김성근-박철순, 둘은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 놓는 사이도 아니다. 김성근이 치밀하고 조용한 성격이라면 박철순은 호방하고 털털한 스타일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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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OB엔 알게 모르게 ‘계파’란 것이 존재했다. 굳이 나누자면 ‘김성근 계’와 ‘이광환 계’, ‘일본야구 파’와 ‘미국야구 파’ 정도로 볼 수 있다. ‘김성근 계’는 김우열 계형철 박상열 조범현이 대표적이었고, ‘이광환 계’는 박철순 김광수 김경문 김형석 등이라 할 수 있겠다.
김성근과
[매경닷컴 MK스포츠 김대호 기자 dhkim@maekyung.com]
사진제공=장원우 전 주간야구 사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