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김원익 기자]
‘잠실 홈런왕’ 그리고 ‘터미네이터’ 김상호. 90년대 OB베어스의 팬들은 호쾌한 스윙으로 까마득한 상공까지 홈런을 날렸던 홈런왕 김상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불사조’ 박철순, ‘미스터 OB’ 김형석과 함께 OB의 두 번째 우승을 선물해준 그였다. 특히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첫 홈런왕의 영예는 바로 김상호의 것이었다. 김상호는 1995년 홈런왕·타점왕·MVP를 모두 석권하며 OB의 기적과 같은 우승을 이끌었다. 이제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사업가로서, 유소년 야구와 사회인 야구 발전에 앞장서는 야구교실의 원장으로 변신한 ‘전설’ 김상호를 MK스포츠가 만났다.
上에 이어
김상호는 그라운드 안팎에서 열정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그 괄괄하고 뜨거웠던 성격이 그를 야구선수로서 롱런하지 못하게 한 양날의 검이 되기도 했다. 사진=김상호 제공 |
맞다. 초유의 사태였다. 오죽하면 9시 뉴스 톱기사로 우리를 다룰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줬다. 하지만 자발적인 항명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어쩔 수 없다니
우리 모두 엄연히 프로야구 선수들이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남편이고, 한 가정의 가장인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구타가 있었다. 야구를 못해서 맞는 것도 당시의 정서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날 더운 날씨에서 우리가 무기력한 플레이를 하다가 졌다. 실책도 겹쳐지면서 감독님이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경기 종료 후 우리를 모두 엎드려 뻗치게 했다. 그리고 수석코치에게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박철순, 나, 장호연, 김형석 등 고참 선수 6명이 나서 “못 맞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당시 주장이었던 내가 먼저 총대를 맸다.
시일이 지난 일이었지만 1994년 항명 파동을 언급하는 김상호의 표정은 침울했다. 하지만 분명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도 했다. 사진=김영구 기자 |
감독님도 갑자기 선수들이 그렇게 나오니까 당시에는 오해하고 화가 많이 난 상황이었다. ‘못 맞겠는 사람은 일어나고 야구 하기 싫은 사람은 나가’라고 했고, 17명이 일어났다. 감독님은 ‘선수들 목욕시켜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말했고, 이후 우리가 정말로 버스를 타고 올라와버리면서 일이 커졌다. 그리고 결국 감독님이 사임하시고 당시 사건을 주동했던 고참급 6명이 구단으로부터 벌금 제재를 받는 것으로 사건이 끝났다. 하지만 당시 갈등은 불씨로 두고두고 남았다. 소위 말해서 구단으로부터 ‘찍힌 것’이었다. 결국 모두 몇 시즌 후 뿔뿔이 팀을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다음해인 1995년 7위에서 1위로 성적이 훌쩍 뛰었다
우리는 보여줘야 했으니까.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야구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것을 팬들에게 경기로 보여드려야 했다. 그만큼 모두에게 절실했었던 한 해였다. 노력했던 만큼 팬들도 성원해 주셨다.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 세웠던 홈경기 흥행기록이 몇년 전에서야 비로소 깨진 것으로 알고 있다. 잠실구장을 늘 메웠던, 우리를 믿어줬던 팬들의 성원이 1995년 OB베어스의 기적을 이끌었던 원동력이었다.
김상호는 1995년 골든글러브, MVP, 홈런왕, 타점왕을 모두 수상하며 뜨거운 한 해를 보냈다. 사진=김상호 제공 |
그랬다(씁쓸하게 웃으며). 이후에 홈런도 20개를 다시 쳐보고, 3할도 쳤다. 하지만 허리 부상으로 부진이 길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1998년 김동주, 우즈라는 거포 야수가 팀에 전력으로 보강됐다. 나의 자리는 없었다. 팀에서 안 그래도 벼르고 있던 시기였고, 곧바로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1998년 출장 경기수가 34경기로 많지 않았다. 앞선 1997년 타율 3할1푼5리를 기록하며 꾸준한 기량을 과시했는데, 갑작스럽게 기회를 잃었다.
1998년 시즌 전 시범경기서 팀 내 타자들 중 최고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이후 개막전 출장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경기에 자주 나서지 못했다. 이제 와서 솔직하게 말하면 외부 압력이 있었다. 내가 당시 구단에서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았다. 거기에 꼬장꼬장한 성격에 프런트와도 충돌이 있었다. 결국 항명사건 때부터 박힌 미운털이 나중에 발목을 잡았다. 세대교체를 원하는 프런트의 압력이 있었다. 물론 김인식 감독의 선택은 이해를 한다. 김인식 감독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뿐이다. 걸출한 신예선수들과 용병까지 들어온 마당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기회를 잃은 나의 입장에서는 구단의 ‘선수 죽이기’라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선수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떠났다. 당시 레전드들 중 지금 두산에 어떤 방식으로던지 남아 있는 이들이 없다.
돌아온 친정팀 LG였지만, OB에서 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사진=김상호 제공 |
1990년 MBC(LG의 전신)에서 OB로 이적할 당시에는 이광환 감독님이 나를 원한 이유가 컸던 것으로 들었다. 1990년 MBC 지휘봉을 잡고 있었던 백인천 감독님도 내게 애정이 컸다. 간결하고 정확한 스윙을 많이 가르쳐 주려했지만, 나는 알다시피 그런 스타일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웃음). 또 그때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을 좋아하셨는데 마침 OB에서 재일 교포 출신인 최일언 현 NC 투수코치의 트레이드 문의가 있으니까 굉장히 기뻐하시면서 나를 보내준 것으로 알고 있다. 서로 트레이드 상대가 된 팀의 감독들이 좋아했던 경우였다. 1999년 두 번째 팀으로 돌아오는 트레이드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무엇인가?
사실 나는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될 뻔 했다. 1998년 팀 전력에서 의도적으로 완전히 제외되면서 일찌감치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나는 당시 프런트와의 관계가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날 원하지 않는다면 트레이드를 해달라’고 요청을 해뒀고 구단에서도 의사를 받아들여 꾸준히 트레이드를 진행한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결국 시간만 흘러갔다. 알고보니 내게 숨겼던 일이 있었다. 이정훈 현 한화 2군 감독과 막역한 사이다. 형제처럼 가깝다. 그런데 그 해 시즌이 많이 지난 어느날 굉장히 화가 난 목소리로 전화가 와서는 ‘너 우리 구단에서 2억원 줄테니 달라고 너네 팀에다가 연락 넣은지 오래됐다던데 무슨 이야기 들은 것이 없냐’고 전화가 왔다.
촉망 받았던 유망주는 그렇게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와 2000년 자의로 유니폼을 벗었다. 사진=김상호 제공 |
그랬다. 구단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구단의 ‘선수 죽이기’의 대상이 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요청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류택현과 함께 1억원을 받는 조건의 현금 트레이드로 LG로 건너갔다. 한화는 2억원에 나 혼자만 데려오는 조건이었고, LG는 2명에 1억원을 주는 조건이었다. 상식적이라면 한화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맞았다. 그런데도 트레이드를 시키지 않은 것이다. 사실 구단의 입장에서는 주축 선수를 이적시켜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 같다. 당시 작은 대전구장을 홈으로 쓰는 한화로 이적한다면 2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내보낸 선수가 이적한 팀에서 성적이 잘 나오면 팬들의 비난을 받을까봐 우려했던 것이다.
돌아온 친정팀은 어땠나
(습쓸하게 웃으며) 그렇게 LG로 돌아오고 나서는 좋은 기억이 없다. 허리 부상도 있었고 정신적으로 야구를 하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초기 MBC에는 좋은 형님들 밑에 막내로 있으면서 즐거운 추억들이 많았다. 하지만 당시 돌아온 1999년 LG는 모래알같은 팀이었다. 박철순 형님을 필두로 완전 강하게 뭉쳐있었던 OB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시 LG에는 스타가 많았고 개인주의의 색깔이 짙었다. 나는 그런 LG의 팀 컬러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야구에 손을 놓다시피 하다가 2000년 시즌 중반에 야구에 완전히 질려서 곧바로 옷을 벗었다. 구단에 내가 먼저 자청해서 은퇴를 요청했다.
뜨거웠던 그라운드에서의 기억들을 품고 이제 야구교실의 원장으로서, 사업가로서 새 삶을 꾸려가고 있다. 1995년 페넌트레이스 MVP, 타점왕, 홈런왕 트로피를 안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상호. 사진=김영구 기자 |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 최근 LG 선수들의 플레이만 봐도 달라진 것이 느껴진다. 뭐랄까 팀으로서 하나된 간절함이 엿보인다. 거기에 김기태 LG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역할이 큰 것 같다. 선배들 역시 그라운드 위에서 플레이로서 최선을 다하고 후배들도 기회를 잡기 위해 작은 역할에도 필사적으로 뛰는 모습이 보인다. 팀으로서의 야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야구장을 떠났어도 매일 야구를 보고 있다. 두산과 넥센의 경기를 열심히 챙겨보는 중이다. (웃음)
下에서 계속
인터뷰 내내 김상호는 개인보다 팀으로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사진=김영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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