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초창기, 이름이 다소 특이한 선수가 한 명 있었다. 정현발. 한 번에 귀에 쏙 들어올 정도로 흔한 이름이 아니다. 그를 기억하는 야구인들은 호쾌한 타격과 넘치는 파워를 우선적으로 입 밖에 꺼낸다. 정한발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타격에 눈부신 재능이 있었다. 프로야구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는 한국야구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B급 스타로 불리는 A급 스타
정현발은 스스로 자신을 ‘B급 스타’로 부른다. “나를 기억해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그저 야구를 좀 했던 선수로만 기억할 것이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정현발이 프로야구사에 이렇다 하게 남긴 건 없다. 1982년부터 1988년까지 7년간 프로야구 무대를 누볐지만 타이틀 하나 차지하지 못했다. 연도별 상위 10위 안에 들었던 것도 1987년 13개의 홈런으로 이 부문 5위를 기록한 게 유일했다.
그러나 프로의 문이 열렸을 때, 그는 전성기가 꺾인 시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물갔다는 평을 듣는 30대에 프로야구 무대에 뛰어들었다. ‘1,2년 뒤면 그만 두겠지’라는 인식이 강했다.
시계를 좀 더 앞으로 돌려보면, 그는 ‘A급 스타’였다. 프로야구가 태동하기 전인 1970년대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했던 이가 정현발이었다. 그는 언제나 ‘최고’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경북고 시절, 1971년 전관왕을 이뤘다.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화랑대기 등 5개 대회를 모두 휩쓸었다. 남우식, 천보성, 배대웅, 손상대 등이 그와 함께 경북고를 고교야구 최강으로 이끈 동료들이었다. 그 중에서 빛난 건 정현발이었는데, 최우수선수상은 대부분 그의 몫이었다. 제14회 이영민 타격상마저 수상했다. 잘생긴 외모까지, 그는 고교야구 최고의 스타였다.
옥수수 빵을 배불리 마음껏 먹고 싶어 야구부에 들어간 정현발은 100m를 11초3에 주파하는 ‘준족’이었다. 하지만 그의 특기는 역시 타격이었다. 아주 깔끔한, 교과서적인 스윙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거기다 키가 174cm인 그는 건장한 체격이 아님에도 ‘순발력’이 빨랐고, ‘힘’이 무척 셌다. 지독한 훈련 벌레이기도 했다.
정현발은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학우들이 영어를 술술 읽는 걸 보고 꽤나 놀랐다. 진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운동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단체 훈련이 끝나도 빈 교실에 들어가 다들 집에 갈 때까지 개인 훈련을 했다. 또, 집에서도 딱히 할 게 없으니 아령을 이용해 힘을 기르는데 집중했다. 어렸을 때 소 먹이를 주기 위해 매일 산을 탔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기초 체력도 다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고교야구에서 맹위를 떨쳤던 정현발은 어디를 가든 펄펄 날았다. 한양대 진학 이후에도 잘 나갔던 그는 동기들과 함께 1976년 창단한 실업 롯데 야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롯데의 4번타자로 활약한 그는 첫 해 우승을 차지하며 롯데 돌풍을 일으켰다. 정현발은 “올해 1군 무대에 처음 뛰어든 NC가 곧바로 우승한 것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그만큼 대단했다”라며 웃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정현발은 삼성에 입단했다. 연고지역 고교 졸업 선수를 우선 지명하는데, 경북고 출신인 정현발은 대구로 내려갔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고교, 대학, 실업 무대를 주름 잡던 정현발이었지만 프로 무대는 냉혹했다.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그는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서 빠졌다. 발목 부상이 있었지만, 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현발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80경기 가운데 54경기를 뛰는데 그쳤다.
일면 이유는 있었다. 삼성의 선수층이 워낙 두꺼웠다. 대구상고와 경북고 출신 선수들로 꾸려진 삼성은 팀을 2개로 나눠도 될 정도로 ‘호화 멤버’를 자랑했다.
여기에 정현발은 코칭스태프와 관계도 불편했다. 터울이 많지 않았으니 껄끄러웠다. 실업야구 시절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의 스프링캠프에 3년 연속 참가해 프로야구를 경험한 그로선 제 자리를 잡지 못하던 국내 풍토와 충돌하는 게 적지 않았다. 이른바 미운 털이 박힌 셈이다.
경기에 제대로 뛰지 못하니, 자존심이 퍽 상할 수밖에 없었다. 정현발은 “충격이 매우 컸다. ‘삼성의 4번타자는 당연히 나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덕아웃에 앉아 경기를 지켜봐야 하는데 굉장히 불편했다. 가족들도 이 때문에 괴로워했다. 지금에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그랬다”고 말했다.
정현발은 그래도 유니폼을 벗지 않았다. 계속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었다. 정현발은 “그만두기에는 미련이 남아있었다. 규정 타석을 한 번도 채우지 못했기에 그것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더라”라고 했다.
정현발은 1986년 시즌을 마친 뒤 재일동포 김기태와 트레이드로 청보로 이적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신 삼성이 투수력 보강을 위해 단행한 트레이드였다. 하지만 정현발에겐 기회였다.
정현발은 “아내는 고향을 떠나야 하니 기분 나빠하더라. 그러나 프로의 세계에서 선수로선 구단의 처사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삼성에서 아쉬웠던 것들을 털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보로 간 후 차라리 빨리 (삼성에서)나올 걸이라는 생각도 들더라”라고 말했다.
정현발은 1987년 103경기에 출장해 75안타 13홈런 49타점을 기록했다. 모두 다 커리어 하이였다. 35세였지만 그는 청보의 중심타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에 연봉도 1000만원이나 인상됐다. 당시로선 큰 액수였다.
정현발은 “삼성 시절에는 규정 타석을 못 채우니 연봉 인상 요인이 딱히 없었다. 그렇다보니 나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다른 팀 선수가 나보다 돈도 많이 받았다. 그때는 연봉이 선수를 평가하는 잣대였다. 자연스레 나는 B급 선수로 평가됐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는데 청보에서 어느 정도 회복은 했다”고 이야기했다.
가장 큰 폭으로 연봉이 뛰어 올랐지만, 그 이듬해가 정현발의 마지막 현역 시절이었다. 태평양이 청보를 인수했는데 성적이 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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