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초창기, 이름이 다소 특이한 선수가 한 명 있었다. 정현발. 한 번에 귀에 쏙 들어올 정도로 흔한 이름이 아니다. 그를 기억하는 야구인들은 호쾌한 타격과 넘치는 파워를 우선적으로 입 밖에 꺼낸다. 정한발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타격에 눈부신 재능이 있었다. 프로야구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는 한국야구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오랜 코치 생활, 끝까지 오르진 못했다
1988년 현역에서 물러난 정현발은 곧바로 지도자로 데뷔했다. 김성근 감독이 태평양에 부임하고서 정현발을 타격코치로 임명했다.
그런데 선수 생활을 연장할 지도 몰랐다. 정현발은 “김성근 감독이 나중에 이야기를 하시더라. 내 기록을 살펴본 뒤 장타력이 있어 대타로 쓸 만하다고 여기셨다는 것이다. 선수로서 기용하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워낙 구단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에 그 뜻을 접었다고 하셨다”며 입맛을 다셨다. MBC의 비공식 영입 제의가 있기도 했지만, 그는 태평양의 공식 코치 제의를 수락했다. 연봉이 선수 시절보다 반 토막이 났지만,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1993년 태평양을 나온 정현발은 1년을 쉬고 해태로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1996년과 1997년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계약 해지’ 통보였다. IMF 사태로 인해,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기울어졌고 야구단도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비해태 출신인 정현발은 퇴출 1순위였다. 스스로 짐을 쌌다. 또 다시 1년을 쉰 정현발은 롯데로 가, 2년을 더 타격코치로 역임했다. 그러나 그게 그의 프로 무대 마지막이었다.
감독직에는 점점 젊은 지도자가 들어섰고, 정현발보다 후배들이 지휘봉을 잡았다. 점점 그가 설 곳이 없었다.
정치적이지 못했던 정현발은 뒤늦게 깨달았다. 정현발은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지도자는 또 그렇지가 않더라. 선후배들에게 잘 보이도록 노력도 했어야 했는데 난 그걸 몰랐다. 기다리면 누군가가 불러줄 줄 알았는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더라. 사실 1년 쉬고 새로운 직장을 가졌던 게 엄청난 행운이었다”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야구계를 떠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야구인’ 정현발로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배운 게 야구 밖에 없으니 따로 돈을 벌 수단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자격증은 운전면허증 뿐인데, 택시운전사가 될 용기도 없었다.
결국 그는 야구계에 남았다. 그러나 방망이가 아닌 마이크를 잡았다. 2000년부터 5년간 TBC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주변의 권유로 2005년 현장으로 복귀했다. 경찰청 야구단의 수석코치로 부임한 것이다. 무명 최형우를 키워내며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그도 슬슬 지쳐만 갔다.
그리고 야구계를 떠나기로 결심을 했다. 자신만의 야구를 펼치고 싶었지만, 그는 꿈꿨던 감독을 맡지 못했다. 그가 그렸던 걸 그리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어느새 50대 중반을 넘었고 현장 복귀는 힘들어 보였다. 정현발은 “점점 나이가 느는데 회의적인 생각이 가득했다. 더 이상 야구는 나와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또 다른 인생 설계를 위해 새로운 일을 열심히 해보자고 각오를 다졌다”고 말했다.
정현발은 야구와 담을 쌓았다. 더 이상 그를 불러줄 곳도, 찾아갈 곳도 없었다. 프로 무대도 고교 무대도 감독 경력도 없고 나이만 많은 그가 가기엔 힘들었다.
4년 동안 야인 생활을 했다. 지인의 소개로 중소 건설회사에 재직했다. 첫 직장 생활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기업도 수익을 올리며 기반을 닦는 듯 했다. 그러나 건설업이 불황을 겪으면서 휘청거렸다. 이번에도 직장을 나와야 했다.
‘백수’가 된 그는 새 직장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역시 배운 게 야구 밖에 없던 그가 돌아갈 곳은 야구계였다. 지난 3월 인천의 재능대학교에서 야구부를 창단하면서 초대 감독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개 모집이었다. 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지원서를 제출했고, 면접을 통과하면서 감독으로 임명됐다. 그의 지도자 이력 가운데 첫 감독이다.
정현발은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대학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만약 계속 (야구가 아닌)다른 일을 했다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구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해도 결국 야구와 인연이 닿더라. 옥수수빵에 이끌려 야구로 인생을 시작했듯이, 이제 인생의 끝에서도 야구와 함께 하게 됐다. 야구는 내게 운명과도 같은 것 같다”고 전했다.
정현발은 요즘 눈코 틀 새 없이 바쁘다. 오는 11월 야구부가 공식 창단하는데 20명의 선수를 꾸릴 계획이다. 공개 테스트 등을 진행하겠지만, 그 전까지 우수한 선수를 확보해야 하는 게 그가 할 일이다. 그래서 발품을 팔고 있다. 황금사자기 대회를 보러 창원에 내려가고, 주말 고교리그를 보러 수도권 야구장을 돌고 있다.
기실 선수 수급은 쉽지 않다. 인프라는 제한되어 있고, 대다수 고교 선수들은 프로를 꿈꿀 터다. 또한,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명망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한다. 부실한 곳도 적지 않은 터라, 선수나 학부모 입자에서 잘 들어보지도 못한 2년제 대학교에서 야구부를 창단한다는 게 썩 와 닿지는 않는다.
정현발은 이에 대해 인천재능대만의 특색을 강조했다. 인천재능대는 야구부원이 마음껏 기량을 뽐내고 야구계로 나갈 수 있게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계획이다. 등록금만 내면 지속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하면 장학금을 받듯, 야구를 잘 해도 장학금을 준다. 회비 등 별도로 들어가는 돈은 없다.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대우다. 나아가 산업협력학교의 특성을 살려, 야구를 떠나 사회 취업 알선도 책임지겠다는 것이 이기우 총장의 공약이다.
정현발은 “대학 야구는 그동안 금품수수 등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제기됐다. 후발 주자이긴 해도 풍토를 개선해 이상적인 대학 리그를 끌고 갈 명품 야구부를 만들겠다. 야구를 잘 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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