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美 조지아 애틀란타) 김재호 특파원] 미국은 넓고 광활하다. 웬만한 주(州 )면적이 한국보다 넓다. 땅이 넓은 만큼 사람도 많고, 사람이 많은 만큼 모든 것들이 복잡다양하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동시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 미국이다. 그곳에 홀몸으로 부딪힌 이가 있다. 전 LG트윈스 투수 김기범(48). 현역 시절 ‘곰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LG에서 보낸 지난 세월을 되돌아봤다. 성적에 목말라 있는 LG팬들을 위한 말도 잊지 않았다.
1989년 4월 8일. 김기범은 잠실구장에서 열린 OB와의 시즌 개막전에 선발 등판했다. 그전까지 MBC는 OB에게 유난히 약했다. 1983년 개막전에서 장호연에게 완봉패당한 이후 4년 연속 패했다. 장호연에게만 3패를 당하며 아쉬움을 삼켰다.
김기범은 그 아쉬움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9이닝 4피안타 1실점을 기록하며 5이닝 5실점에 그친 상대 선발 장호연을 압도했다. 1실점도 9회 마지막 수비에서 유격수 김재박의 실책 때문에 나온 실점이라 비자책으로 기록됐다.
“나중에 (김)재박 선배가 신인 투수가 첫 데뷔전부터 완봉승하면 너무 부담을 느낀다며 부담을 덜어줄려고 일부러 실책했다고 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웃음).”
뜻하지 않은 어깨 부상, 그리고 재기
1990년, MBC청룡은 LG라는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팀 이름도 트윈스로 바뀌었다. 김기범은 “당시 구단주였던 구본무 회장께서 야구를 무척 좋아하셨다. 팀에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고, 야구 할 맛이 났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팀이 우승한 1990년 5승 5패 평균자책점 2.81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LG 선발진의 한 기둥으로 자리 잡았다. 1991년에는 12승 9패 평균자책점 2.95로 10승 투수 대열에 오르기도 했다.
1992년 방위 복무를 하며 퇴근 후 홈경기에만 나서는 등 제한된 출전을 했지만, 8승 6패 평균자책점 2.98로 선전했다. 완봉 1회를 포함한 6번의 완투가 있었다. 방위 복무 2년 차 해였던 1993년에는 전반기에만 8승을 거뒀다.
“드디어 내 야구 인생에 봄날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깨가 갑자기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방위병을 하면서 훈련 없이 경기만 뛴 것이 문제였다.”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구원 투수로 반짝 활약한 그는 1995 시즌을 앞두고 재기에 나섰다. 국내 최고의 재활 전문가로 알려진 어은실 트레이너가 그의 재활을 도왔다. 이광환 감독도 “선발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그 해, 그는 13승 7패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손상된 인대는 회복할 수 없었다. 대신 근육 힘을 키워 이것으로 버텼다. 경기를 마치고 내려오면 물건을 손으로 쥘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최고의 재활 시스템 덕분에 계속해서 공을 던질 수 있었다.”
원치 않은 보직 변경, 그리고 은퇴
부상에서 벗어났지만,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대교체’의 바람이었다. 1996년 시즌 도중 지휘봉을 잡은 천보성 감독대행은 ‘세대교체’를 원했고, 노장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김용수를 비롯 정삼흠, 김태원 등 선발진을 지키던 투수들이 하나 둘씩 밀려났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해 두 경기 선발로 나가고 중간계투로 밀려났다. (김)태원 선배는 이에 반발해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결정을 따랐다. 나중에 지도자를 할 때 다양한 보직을 경험하는 것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중간계투로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1997년 54경기, 1998년 76경기에 출전하며 자기 역할을 했다. 1998년 76경기 기록은 시즌 최다 출장이자 역대 한 시즌 최다등판 기록이었다.
“선수협을 만들기 위해 각 팀의 고참 선수들이 주도에 나섰다. 당시 LG에서는 나와 송유석이 주동자였다. 김용수 선배는 지켜 드려야 할 분이었고, 대신 우리가 총대를 멨다.”
파동이 일단락 된 뒤,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다른 생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이 돌아온 거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주동자 대부분이 쫓겨나듯 트레이드 됐다. 그렇게 주동자들을 서로 트레이드하며 섞어 버렸다. 이대로 현역 생활을 이어가느니 은퇴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구단에서는 그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훈련 거부로 맞섰다. 그리고 2000년 7월, 구단주가 마침내 뜻을 꺾었다. 그는 2000년 7월 16일 은퇴식을 열고 정든 마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나를 위해 구단에서 성대하게 은퇴 행사도 치러줬다. 지금도 구단주께 감사드리는 부분이다. 지금도 프로야구에서는 은퇴식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옷벗는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그에 비하면 난 정말 행복한 선수였다.”
그가 말하는 LG “뼈대를 찾아라”
그의 친정팀 사랑은 “LG가 아니면 절대로 안 간다”고 말할 정도로 각별하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LG에 대해 물었다. 그도 몸은 이역만리 타국에 있지만, 마음은 잠실야구장에 있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되는 부진을 겪고 있는 팀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했다.
“팀을 유지할 수 있는 뼈대가 필요하다. 어느 순간부터 LG에는 선수들이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이 팀 출신 감독이나 코치가 사라졌다. 그런 지도자들이 선수단의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그는 “뉴욕 양키스만 봐도 그렇다. 그 팀에 입단한 선수들은 무조건 면도를 단정하게 해야 한다. 그 외에도 그 팀 선수로서 지켜야 할 규정들이 수두룩하다. 한국에도 선수들이 그 팀의 일원이라는 것을 느끼고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간을 강조했다. “국가를 개발할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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