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美 조지아 애틀란타) 김재호 특파원] 미국은 넓고 광활하다. 웬만한 주(州 )면적이 한국보다 넓다. 땅이 넓은 만큼 사람도 많고, 사람이 많은 만큼 모든 것들이 복잡다양하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동시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 미국이다. 그곳에 홀몸으로 부딪힌 이가 있다. 전 LG트윈스 투수 김기범(48). 사업가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성공의 열매를 키워나가고 있는 그가 자신이 걸어 온 야구 인생을 되돌아봤다.
축현초, 동인천중, 충암중, 충암고를 거친 그는 1984년 대학교에 진학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수한 선수를 영입하려는 경쟁은 치열한 법. 그를 데려가기 위한 대학들의 경쟁도 치열했다.
“당시 고대 감독이었던 최관수(작고) 감독님이 나를 영입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이셨다. 한 달 동안 우리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런데 사실 난 연세대를 가고 싶었다.”
쟁쟁한 명문대들이 그를 노렸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대학교는 고려대도, 연세대도 아닌 건국대였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곳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우리 아들은 물건이 아니’라며 거절하셨다. 그런데 한을룡 건국대 감독님과는 마음이 맞으셨다. 아들을 물건이 아닌 사람으로 대하는 모습에 끌리셨고, 건국대를 선택하셨다. 물론 두 분이 같은 평안도 출신인 것도 크게 작용했다(웃음).”
작은 체구 때문에 놓친 ML 기회
건국대에 진학한 그는 건국대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점점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대학교 2학년 때인 1985년 캐나다 에드몬튼에서 열린 대륙간컵 세계야구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홀로 4승을 거두며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조별예선 일본전에서 완투하며 12-2 승리를 이끌었는데, 당시 승리는 국제대회 사상 처음으로 한국이 일본을 콜드게임으로 처음 이긴 경기였다. 3일 뒤 미국전에서는 연장 11회까지 완투하며 4-2 승리를 뒷받침했다.
“당시 미국전을 이기면 4강전에서 일본과 붙는 거였고, 지면 쿠바와 붙는 거였다. 당연히 일본과 붙는 게 쉽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집중해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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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전을 하기 전, 협회 회장이 와서 ‘지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우승할 때 쿠바가 불참했으니, 이를 소급적용해 이번 대회에서 일본만 이기면 병역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선수들 모두 죽어라 뛰었고, 4강전에서 일본을 이겼을 때 우승한 것처럼 좋아했다. 그런데 결승전을 앞두고 ‘앞에 한 말은 무효다. 우승해야만 병역 혜택이 있다’고 말을 바꿨다. 선수들 모두 ‘쿠바를 어떻게 이기냐’며 의욕을 잃었고, 결국 결승에서 쿠바에게 역전패를 하고 말았다.”
준우승에 그쳤지만, 그에게 대륙간컵 대회는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대회였다. 그에 대한 관심은 미국에도 전해졌다.
“대륙간컵이 끝나고 메이저리그 2~3개 팀 정도에서 나를 보러 왔다. 정확한 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메이저리그에 갈수 없었다. “키가 작은 게 문제였다. 그쪽에서는 내가 이렇게 작은 선수인지 몰랐다고 한다(웃음). 지금도 드는 생각인데 내 체격이 더 컸다면 그때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메달 획득 실패, 평생의 아쉬움
1985년 대륙간컵의 주축 멤버들은 3년 뒤 서울올림픽에 출전했다. 프로 입단도 1년 미루고 나간 올림픽. 한국은 일본과 준결승에서 격돌했고, 여기서 승리만 해도 메달을 목에 걸면서 병역혜택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일본전 선발은 그였다. 7회 2아웃까지 1-0으로 앞서면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꼬이기 시작했다.
“상대 타자는 나카지마 데루시였다. 다른 대회에서 홈런을 두 번이나 허용한 선수였다. 모두 1-0으로 이기고 있다가 맞은 홈런이었다. 3볼까지 볼 카운트가 몰렸다. ‘설마 치겠어?’하는 생각으로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가운데로 던졌는데 그게 홈런이 됐다. 동점 홈런이었다.”
이후 한국은 뒤이어 등판한 박동희가 추가 실점을 하면서 일본에게 무릎을 꿇었다. 푸에르토리코와의 3-4위전도 0-7로 완패했다. 그 당시에는 푸에르토리코가 어떤 나라인지도 잘 몰랐다. “설마 지겠어?”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경기에 임했지만,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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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병역 혜택을 받았다면 조금 더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92년부터 18개월간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경기를 뛰었는데, 그때 몸이 많이 망가졌다. 훈련은 하지 않고 경기만 뛰니까 어깨에 무리가 왔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 그는 MBC청룡에 입단한다. 여기에도 재밌는 사연이 있다. 같은 서울을 연고로 하는 MBC와 OB는 주사위 던지기로 드래프트 순서를 정했는데, 당시 OB가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겼다. 그러나 OB는 김기범 대신 성균관대 출신의 이진을 지명했다.
“그때 OB는 대학교 때 내가 팔을 너무 혹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난 더 좋아했다. OB보다는
그렇게 그는 프로야구에 발을 들여놓았다. MBC, 그리고 LG트윈스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下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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