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 팔로스 버디스 도로가 파괴된 모습 (AP, 연합뉴스) |
지난 9월 3일, 개빈 뉴섬 주지사는 캘리포니아주 남부 해안가에 있는 랜초 팔로스 버디스에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도시 도로 곳곳이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내리듯 무너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가파른 해안 절벽과 산 능선 위에 세워진 이 도시는 오래 전부터 지반이 서서히 이동했습니다. 다만, 움직이는 속도가 1년에 1인치 그러니까 2.5cm 정도로 느렸기 때문에 도로와 건물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팽창하며 해수면이 상승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높은 파도에 절벽이 깎이며 지반이 이전보다 더 빠르게 이동했습니다. 여기에 폭우까지 내리며 약해진 지반이 경사를 따라 미끄럼틀을 타듯이 흘러내렸습니다. 일주일 동안 30cm나 움직였고 이 여파로 도로가 처참하게 뒤틀렸습니다.
결국 주지사는 해안 절벽과 가까운 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고 화재를 막기 위해 전력과 가스 공급을 차단했습니다. 주민들은 집과 마을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 2023년 해안 침식 등급 (해양수산부) |
도시 붕괴는 랜초 팔로스 버디스 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연안의 평균 해수면은 연평균 3mm씩 상승하고 있고, 1989년부터 2022년까지 10.3cm가 상승했고, 해수면 상승하자 해안이 침식되는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올해 해양수산부가 발표한 연안침식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360개 해안 가운데 43.3%인 156곳이 침식 우려(C등급)와 심각(D등급)을 받았습니다. 특히 경북(59.5%)과 강원도(53%), 충남(54.8%)은 조사한 해안 가운데 반 이상이 C와 D등급을 받았습니다.
↑ 거센 파도로 무너진 강릉 영진해변 (연합뉴스) |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우리나라에서도 해안 침식이 도로나 건물의 붕괴를 유발할 수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해수면 상승에 따른 연안 지역 구조물 붕괴’ 보고서에서 “해안 유실, 지하 수위 상승, 액상화 위험 증가, 해양 외력 증가 등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구조물 붕괴가 우려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연안은 주거, 관광, 산업, 물류 등 다양한 개발 행위가 높은 밀도로 진행되고 있어 이런 시설물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경고에도 ‘미래 세대의 재난’은 충분한 예방 정책 예산을 배정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재난이 잇따르고 있는데,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재난에 많은 돈을 쓸 수 없는 거죠. 보고서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해수면 상승은 연안 지역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만,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 근본적인 대책 수립이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1997년 9월, 영국 런던 서부의 사우스올에서 여객 열차와 화물 열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여객 열차 기관사가 신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선로에 들어서며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찰나의 사고로 7명이 숨졌고, 139명이 다쳤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비슷한 사고가 또 일어났습니다. 1999년 10월, 런던 래드브로크 그로브에서 열차가 적색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다 다른 열차와 충돌한 겁니다. 강하게 충돌한 탓에 인명 피해가 매우 컸는데, 31명이 목숨을 잃었고 400명이 넘는 사람이 다쳤습니다.
잇따른 사고로 영국에선 ATP(Automatic Train Protection)라는 열차 보호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열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선로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열차의 속도도 자동으로 조절하는 시스템입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ATP 시스템을 영국의 전체 선로에 깔라면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면 영국 정부나 철도 회사는 예산이 많이 필요하더라도 ATP를 도입했을 겁니다. 하지만 열차 충돌 사고 발생 확률과 이로 인해 인명피해가 발생할 확률은 낮았고, 이런 낮은 확률의 사고를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긴 어려웠습니다. ATP 설치로 생명을 한 명 구하는 데 1,400만 파운드, 약 260억 원이 필요한 것으로 계산됐고 전면 도입은 무산됐습니다.
그 대신 TPWS(Train Protection & Warning System)가 도입됐습니다. ATP보다는 속도 조절이나 열차 간격 조절 성능이 떨어졌지만, 적어도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일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설치 비용이 ATP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에 비용 대비 얻을 수 있는 편익이 타당한 수준이라고 계산됐습니다.
이 선택은 현실적이고 타당한 결정이었다는 평가와 미봉책에 그쳤다는 평가로 갈렸습니다.
재난 정책을 세울 때는 늘 딜레마가 따라옵니다.
단 한 건의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다면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해야 하나?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냉정하게 평가하고 선택해야 하나?
재난이 미래에 일어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장 돈을 투자하는 게 맞나? 시간이 지나 재난 발생 가능성이 충분히 입증되면 그때 자원을 투입하면 될까?
모두 어려운
재난은 어느 순간이 되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대답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 강세현 기자 / accent@mb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