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GPT>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명작 · 주목할 만한 신간을 소개합니다. 스포일러에 예민한 분은 독서 후 읽기를 권장드립니다.
↑ '나는 솔로' 캡처 (화면제공=sbsplus) |
고민 끝에 ‘나는 솔로’식 짝짓기 TV프로그램에 출연을 신청하는 일반인부터, BTS급 최정상 아이돌의 콘서트 예매 경쟁에서 낙오된 팬, 학생들이 대놓고 엎드려 자는 인기꽝 수업의 선생님, 다 큰 딸 하나 독립시키고 홀로 시원찮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아버지까지….
‘솔로지옥’에 캐스팅당한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아이돌 센터 멤버도 아니며 일타 강사도 아닌 이들. 눈을 뗄 수 없이 화려하지도 대단히 궁핍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인물들이 마주하는 곤란한 풍경으로 마음을 저려오게 하는 책이 등장했습니다. '2024 젊은작가상' 수상자 김기태 작가의 첫 단편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입니다.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사진제공=문학동네) |
극적인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 크고 작은 감정의 파동. 기사로는 단신거리도 못될 법한 장면들은 재기발랄한 작가의 손끝 아래 각 스무 장 남짓의 소설이 됐습니다. 몰랐던 타인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며 내 맘같은 문장 하나, 새로운 딜레마 하나쯤 가슴에 품게 하는 게 좋은 이야기의 힘일 것입니다. 일상적 고충과 모순, 섬광 혹은 섬뜩함 같은 걸 건져 올린 10편의 소설에 스며든 후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던 거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 지 모릅니다.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싱싱함’입니다. 봄이 없어지고 나면 후손들에게 '이게 봄'이라며 들려줘야 한다던 '벚꽃엔딩'처럼, 대한민국의 2020년대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이야기마다 떠오르는 주위 친구나 화제가 됐던 인물, 며칠 전 봤던 기사들이 있습니다. 묘사와 표현력이 어느 숏 폼 콘텐츠에 뒤지지 않을 만큼 재치있고 트렌디합니다.
↑ 왼) 2024 상반기를 강타한 '꽁냥이' 밈, 오) 소설 속 등장하는 '기립하시오! 당신도!' 밈 |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지나간 한 시대는 ‘다이나믹 듀오는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이 되었고, 유노윤호는 지상파 무대 위에서 최강창민의 생일을 축하했다’는 식으로 회자되고, 남녀는 초록색 개구리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밈’ (짤)을 주고받으며, '여름이었다'를 외치며 가까워집니다.
↑ '2024 페스타', BTS를 보러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아미(팬)들 (출처=연합뉴스) |
<세상의 모든 바다>와 <로나, 우리의 별>에는 세계적인 아이돌과 팬 문화가 방금 트위터에서 본 듯 실감나게 펼쳐지고, <태엽 12와 1/2바퀴>에서 젊은이들의 '서핑' 문화가 양양의 낡은 여관을 게스트하우스로의 재기를 노릴 수 있게 합니다.
동시대의 같은 문화권만이 온전히 공유할 수 있을 듯한 정서가 너무 예쁘지도, 누추하지도 않게 과장없이 그려졌습니다. 느껴본 적은 있지만 쉬이 이름붙일 수 없던 감정들…한 시기를 지나는 개인의 내면 풍경과 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한 통찰이 섬세하고 치열합니다. '트렌디하다'는 표현이 얼마간의 가벼운 뉘앙스로 오독될까 우려되지만, 이야기의 시공간적 배경 등의 설정이 현실에 발붙이고 있다는 것뿐. 인물을 그려내는 시선은 결코 가볍지도, 표면적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평범하다고 치부될 수 있는 이야기마다 그 설정은 매우 다양하다는 점도 특징적입니다. 10편의 이야기 속 인물들마다 성별도, 세대도, 성격도, 계급도 다른데, 그들이 처한 현실 역시 한 명의 작가가 그려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구체적입니다. 각 단편을 관통하는 듯한 모종의 유기성은 '이번 주인공, 앞 소설에 잠깐 나왔던 그 사람 같은데?' 같은 재밌는 상상도 펼쳐보게 합니다.
아이돌 그룹의 팬인 한국계 일본인 남성을 앞세운 <세상의 모든 바다>, 40대를 앞둔 유부남의 <전조등>, ‘고전문학읽기’ 수업을 가르치는 국어 선생님의 <보편 교양>. 살 만큼 산 인물들의 권태를 다루나 싶다가도 <롤링 선더 러브>에선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30대 후반 미혼 여성이 되고, <무겁고 높은>에선 실력도, 입지도 별볼일 없는 역도반 여고생도 됩니다.
수록작 중 3편을 스포없이 간략히 소개해보려 합니다.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안 친했다 친해진' 20대 두 남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이야기입니다. 같은 중학교에 다녔지만 서로의 존재만 알던 사이인 둘이 우연히 연고 없는 도시에서 재회합니다. 진주는 아빠가 없고, 재외 동포 4세대인 김니콜라이는 영주권이 없습니다. 그래도 결석하지도 않고 학교도 잘 다녔고, 법을 어긴 적도 없었는데, 하루의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내고 공과금도 기한 냈는데.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은 한탄하듯 서로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롤링 선더 러브>는 신파를 그리워하는 37세 조맹희의 '솔로 예능 프로그램' 도전기입니다. '남미새' (남자에 미친 XX)를 규탄하는 세상 흐름에 발맞춰 의젓하게 홀로 서는 신여성이고 싶다가도, 퇴근하고 돌아온 방구석에선 조금 볼품없더라도 솔직한 마음을 마주합니다. '아 근데, 나는 사랑이 좀 하고 싶다'…. 버리고는 싶지만 빼앗기긴 싫은 어떤 꿈을 좇는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첫 등장 신이 기억에 남습니다.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붐비는 만원 지하철에 끼인 채 이동하는 모습인데, 과연 지하철 맞은 편 쯤에서 본 여자 같기도, 지나간 어떤 날의 나 같기도 합니다.
<전조등>에서 저자는 40대를 앞둔 남성으로 탈바꿈합니다. 한국 사회의 실체 없는 의무, 취업-연애-결혼-출산의 굴레를 무사히 따라온 그. 정말 무사한 걸까요? 안경조차 '너무 네모나지도 둥글지도 않은' 모양만 고수하는 그의 순탄한 여정 속에는 몇 설명할 수 없는 위태로운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더러운 건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고 배웠고, 그런 말이라면 어기는 법이 없었던 그가, 이면의 실상을 들춰볼까요? 행복의 모양이라고 여겨지는 액자 속 인물로 성실히 등장할까요? 소설이 주는 기묘한 찝찝함, 그런 감각을 이희우 평론가는 '정상성의 기묘한 연극성'이라고 설명합니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카롤린 엠케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혐오가 타인에 대한 '상상력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쉽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전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몹시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김기태 유니버스'는 분명히 그 상상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가 만들어 낸 너무나 생생하고 그럴듯한 인물들을 상상하다 보면 그간 마주쳐 온 익명의 타인들이 떠오릅니다. 그들에게 숨겨져 있다고 그려지는 이야기들은 고유한 동시에 보편적인 구석이 있어 스스로의 어떤 모습이 겹쳐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