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자동제동장치 의무 설치 대상 확대
하지만 여전히 대형차 추돌 사고 반복
↑ 봉평터널 버스 추돌 사고 현장 (연합뉴스) |
2016년 여름, 21살 동갑내기 친구 4명은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휴가철을 맞아 차들이 도로로 몰려들었고 평창 봉평터널 앞에 다다르자 정체가 극심해져 친구들이 탄 K5 차량은 도로에 멈춰섰습니다.
그 순간, 빨간색 관광버스가 K5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브레이크를 꾹 밟아 속도를 줄여야 하는 순간이 왔지만 버스의 속도는 줄지 않았습니다. 결국 버스는 K5 차량을 그대로 들이받고 다른 차량 4대까지 추돌하고 나서야 멈췄습니다. K5와 부딪힐 때 속력은 무려 시속 91km였습니다.
이 사고로 동갑내기 친구 4명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른 차량에 타고 있던 운전자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어머니, 동생과 살며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던 희생자의 어머니는 "늘 어머니를 먼저 생각하는 딸이었다"며 "알바비를 아껴 강릉까지 갔는데, 왜 1박만 하고 오냐고 했더니 2박 하면 돈이 많이 든다고 했었다"라고 말하며 오열했습니다.
딸을 잃은 아버지 이 모 씨는 사고 이후 매일 아이스 커피 4잔을 들고 딸이 있는 추모공원을 찾았습니다.. 그는 "딸을 보러 가면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이 사고를 당한 딸 친구들의 부모들을 만난다"며 서로 아픔을 보듬어주며 견디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 영장실질 심사를 마친 방 모 씨 (연합뉴스) |
버스 운전자 방 모 씨는 "사고 당시 몽롱한 상태에서 운전했다"며 졸음운전을 한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그는 1심에서 금고 4년을 선고 받고 '형량이 무겁다'며 항소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오히려 형을 늘려 금고 4년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사고 이후 당시 상황이 담은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됐고, 영상을 본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내 뒤에 있는 버스나 대형차가 졸음운전을 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누구나 사고의 희생양이 될 수 있고, 사고가 난다면 피할 틈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저 운전을 할 때 "내 뒤에서 안 덮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고가 일어나자 정부는 법 개정에 나섰습니다. 2017년, 11m 이상의 버스와 20톤 이상의 화물차나 특수차 등 대형차량에 '비상자동제동장치'를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이 장치는 주행 중 전방 충돌 상황을 감지해 충돌을 완화하거나 회피할 목적으로 자동차를 감속 또는 정지시키는 장치입니다. 한마디로 앞 차와 가까워지는데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차가 스스로 속력을 줄여주는 장치입니다. 처음에는 의자 진동이나 소리 등으로 운전자에게 경고하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강제로 속력을 줄이는 식입니다.
2021년 정부는 설치 의무 대상을 넓혀 승합차와 3.5톤을 초과하는 화물차 등에 설치하도록 했고, 현재는 더 범위를 넓혀 초소형차 등 일부 차종을 제외한 모든 차량에 이 장치를 설치하도록 법을 바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안전해졌을까요? 안타깝지만 법이 바뀐 이후에도 계속해서 대형차량의 추돌 사고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비상자동제동장치가 없는 버스가 도로를 달릴 수 있습니다. 제동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대형차는 법이 통과된 이후에 만들어진 차량입니다. 이전에 만들어진 차량은 장치를 달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의무는 아닌 거죠.
현행법상 우리가 이용하는 버스들의 사용 연한은 최대 13년입니다. 11년이 기본이고 검사를 받아 2년을 추가로 더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동장치를 설치하도록 법이 개정된 게 2017년이니까 아직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비상자동제동장치가 없는 버스들이 도로를 달릴 수 있는 겁니다.
또 비상자동제동장치가 설치돼 있다고 해도 사고를 완전히 막을 순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수 톤에서 수십 톤에 달하는 무게를 가진 대형차나 버스는 관성 때문에 급제동을 해도 바로 멈추지 않습니다. 고속도로 등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장소에서는 장치가 작동해도 피해를 조금 줄여줄 뿐 사고 자체를 막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아, 덤프트럭은 장치 의무 부착대상에서 여전히 빠져있습니다.
↑ 보은 버스추돌 사고 현장 (연합뉴스, 충북소방본부) |
지난 10월 보은군 당진영덕고속도로 수리티터널 안에서 고속버스가 앞서가던 승합차를 들이받아 탑승자 4명이 숨지고 7명이 다쳤습니다. 운전자는 경찰에 "문자를 확인하느라 잠시 휴대전화를 본 사이 사고가 났다"고 진술
시간이 흐르고 법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대형차 추돌 사고는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비상자동제동장치가 없는 차도 도로를 달리고 또 장치가 달렸다 해도 사고를 온전히 막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기도하며 운전대를 잡습니다.
"제발 뒤 차가 안 덮치게 해주세요"
[ 강세현 기자 / accent@mb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