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82년 4월. 한 신문기사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서울과 안동을 거점으로 25년간 장기암약하던 고정간첩 안승진(가명) 등 일당 16명을 검거했다. 일망타진된 간첩 중 검찰에 송치된자의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안성진(가명)(51세. 서울 XX구 XX동 XX의X) XX건설 현장사무소 자재담당 직원
안승억(47세. XX구 XX동) XX건설 현장사무소 관리과장
정기윤(가명)(59세. 경기도 XX시 XX동) 전 X신문 안동지국장)
정경화(가명)(48세. 안성진의 처. XX구 XX동) XX화장품외판원
…
(여기서는 안승억 씨를 제외하고 모두 가명으로 표기하고 실제 주소를 적지 않았지만 당시 신문에는 모든 실명과 실제주소, 실제직장이 표시됐습니다.)
이른바 ‘안동일가족간첩’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사건 이야기입니다.
↑ 사진=Ideogram |
신문기사가 나오기 약 4개월 전인 1981년 12월. 성진, 승억 씨 형제와 성진 씨의 아내인 경화 씨, 성진 씨 형제의 매형인 기윤 씨를 비롯해 일가족과 친척들 10여 명이 잇따라 안기부에 연행됐습니다.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이들이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겁니다.
이유는 성진 씨 형제의 큰형인 안순관(가명) 씨 때문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안 씨 형제들은 경북 안동군(현재 안동시)에서 함께 자랐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순관 씨는 북한에 넘어가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안기부는 이후 형 순관 씨가 남파간첩으로 내려와 활동했고, 성진 씨 형제가 내통해 함께 간첩활동을 했다며 이들을 연행했습니다. 연행 과정에서는 법원이 발부한 체포 영장도 없었습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성진 씨에게 “네가 이북에 안 갔다 왔다 해도 열 번이고 이북에 갔다 온 걸로 만들 수도 있다. 이곳은 남자를 여자로 못 만들고 여자를 남자로 못 만들지 그 외에는 어떤 일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우리 말을 안 들으면 교통사고 난 걸로 차에 치여 죽일 수도 있다. 너희들을 3개월 이상 1년이라도 감금하고 고문을 해도 되며 안기부에 있는 것은 징역일수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며 협박과 고문을 이어갔습니다.
성진 씨 아내 경화 씨는 “하루 종일 뺨을 맞았고, 며칠 동안 발바닥과 손바닥을 작대기로 맞았다. 발바닥이 부어서 화장실을 기어서 가야 했다. 수사관들은 저의 두 손을 묶어서 천장에 매달아 놓고 커다란 몽둥이로 엉덩이와 허벅지 등을 마구 때렸고, 세면기에 물을 받아 머리를 처박더니 숨이 막힐 즈음에 꺼내기도 했다”고 훗날 당시 경험을 진술했습니다.
결국 성진 씨 일가족은 안기부의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간첩 활동을 한 게 맞다는 진술서를 작성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일가족의 간첩 혐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안성진
- 1967년 5월 안순관 등 남파간첩을 대동해 서울시 일대 주요 군사시설을 안내 설명하는 등 지령을 받아 군사기밀을 탐지, 수집
- 같은 해 안순관에게 무전기와 난수표, 공작금 20만 원을 받아 은닉
- 모두 7건 간첩 및 간첩방조 혐의
안승억
- 1967년 6월 집에 안테나를 설치해 남파간첩이 화장실에서 무전을 치도록 주선하고 대가로 공작금을 받는 등 11건 간첩 및 간첩방조 혐의
정기윤
- 안순관 지령에 따라 수력발전소 공사현장 등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지령을 받은 혐의
정경화
- 안순관과 대동한 남파간첩의 지령을 받아 전달하는 등 간첩방조 혐의
재판에 넘겨진 이들은 이후 안기부의 고문에 의한 거짓진술임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성진 씨는 무기징역, 승억 씨는 징역 12년, 기윤 씨는 징역 7년, 경화 씨는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됐습니다.
온 일가족이 간첩으로 몰렸고, 신문기사에 신상정보와 주거지까지 공개됐으니 이들 일가족이 겪은 고통은 짐작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들의 명예회복이 시작된 건 20년이 넘은 2015년이 되어서부터였습니다.
↑ 서울고등법원 (사진=연합뉴스) |
지난 2015년과 2017년에 걸쳐 성진 씨와 승억 씨가 먼저 재심을 청구했고 받아들여져 재심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무려 5년이라는 재심 재판 기간이 소요됐고 그 사이 성진 씨는 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2020년 재심 재판부였던 서울고법 형사10부(박형준 부장판사)는 성진 씨와 승억 씨에게 내려진 무기징역와 징역 12년 판결을 파기했습니다.
- 2020. 1. 9. 안성진·안승억 씨 재심 선고
그런데 잘못된 선고를 파기한 재심 재판부는 성진 씨와 승억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게 아니라 각각 징역 3년 6개월을 다시 선고했습니다. 일부 간첩 혐의는 인정된다는 겁니다.
재심 재판부는 일단 큰형 순관 씨가 남파간첩인 건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순관 씨가 북한에 거주하고 있었던 점과 1960년대 남한으로 여러 차례 내려온 건 사실이고 내려온 게 남파간첩활동을 목적으로 온 건 맞다고 본 겁니다.
순관 씨가 간첩이라는 전제하에서 1980년대 받은 재판 당시 성진 씨와 승억 씨가 법정에서 한 진술 중 간첩 행위를 인정한 것과 인정하지 않은 것이 나뉘는데 재심 재판부는 형제가 범행을 인정한 부분을 신빙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법정에서 부인할 거면 전부 부인하면 되는데 굳이 몇몇 범행을 인정한 건 실제 간첩 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2020. 1. 9. 안성진·안승억 씨 재심 선고
재심 재판에서 생존해 있던 승억 씨는 당시 일부 간첩 행위를 자백한 걸 번복했습니다. 이 역시 허위 자백이었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재심 재판부는 “기존 자백 진술의 신빙성을 무너뜨리거나 번복 진술의 객관적 합리성을 뒷받침할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고 기존 자백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고 번복 진술을 신뢰할 사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심에서도 일부 간첩혐의는 인정돼 버리자 승억 씨는 상고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역시 2020년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기존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습니다.
승억 씨 가족을 대리한 김형태 변호사는 기자와 통화에서 “이상한 판결”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큰형 순관 씨가 여러 차례 남한으로 내려온 건 맞지만 간첩으로 내려온 게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왔을 뿐이라는 겁니다. 순관 씨가 금품을 가지고 내려와 건네준 사실이 있지만 이 역시 가족들에게 주려고 했을 뿐이지 공작금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고 김 변호사는 설명했습니다.
성진 씨와 승억 씨가 애매한 명예회복에 그친 뒤 3년이 흐른 지난 9월 22일 기윤 씨와 경화 씨에 대한 재심 선고도 나왔습니다. 두 사람의 재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7부(이규홍 부장판사)는 기윤 씨와 경화 씨의 유죄를 모두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다만, 이번 재판에서도 형 순관 씨가 남파간첩이라는 전제는 유지됐습니다. 고문에 의한 진술이 증거능력이 없다는 점, 단지 간첩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없거나 순관 씨가 간첩이라는 점을 몰랐다는 점이 인정됐을 뿐이었습니다.
기윤 씨와 경화 씨는 재심을 청구하기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녀들이 대신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때문에 당사자들은 생전에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나마도 검찰이 경화 씨에 대해서는 상고한 만큼 대법원 판단을 다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생존해 있는 승억 씨를 비롯해 피해를 본 일가족, 그리고 사망한 일가족들의 자녀는 국가로부터 받은 피해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5월 26일 2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18부(민성철 부장판사)는 승억 씨 일가족에게 모두 9억 7,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단했습니다.
민사 재판부는 “성진 씨와 승억 씨 등이 불법 구금된 동안 고문과 기타 가혹행위가 있었음이 인정되고, 위법한 수사로 인해 성진 씨는 4,818일 동안, 승억 씨는 1,725일 동안 구금됐음이 인정되므로 불법행위로 인해 입은 손해를 국가가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민사 재판부 역시 “재심판결에서 확정된 3년 6개월의 징역형 집행기간은 제외한다”고 밝혔습니다. 성진 씨와 승억 씨에게 재심에서 간첩행위가 일부 인정된 게 그대로 받아들여진 겁니다.
승억 씨 가족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재심은 되돌릴 수 없지만 민사재판에서라도 마지막 명예회복의 지푸라기를 잡아보겠다는 겁니다.
승억 씨를 오랜 기간 도와준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은 기자와 통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