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 검열 심해”
“전두환 전 대통령 닮았다고 연재 종료”
“신문팔이, 우산 장사 하면서 만화가의 꿈 키워”
“친구 따라 갔다가 선배 대타로 둘리 연재 시작”
“우리 삶의 모습이 둘리 등 캐릭터에 투영”
“둘리를 통해 아이들이 갖고 있는 꿈 발산”
“만화가 되겠다니 주변 반대 심해…아버지가 응원”
“내년에 출판 만화 통해 새로운 둘리 이야기 계획”
■ 프로그램: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 (시사스페셜)
■ 방송일 : 2023년 6월 18일 (일요일) 오후 3시 30분
■ 진 행 : 정운갑 앵커 (논설실장)
■ 출연자 : 김수정 작가
**기사 인용 시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시사스페셜)’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정운갑>작가님 안녕하세요.
김수정>반갑습니다.
정운갑>둘리 탄생 40주년이 됐네요. 축하드립니다.
김수정>감사합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냥 40년이 쭉 흘러버렸네요.
정운갑>여기가 둘리 뮤지엄이죠?
김수정>맞습니다. 여기가 그 둘리가 본래 태어났던 그 배경으로 해서 둘리 뮤지엄을 만들었죠.
정운갑>여기가 둘리 작업실을 재현한 방인가요?
김수정>네, 맞습니다. 한창 둘리를 그릴 때의 방, 제 방을 재현했는데 실질적으로 책상 같은 경우는 그때 당시에 책상이 없어서 비슷한 걸 했고, 옷 같은 거는 진짜 제 옷이에요.(웃음)
정운갑>40년 전 그때 그 책상, 옷가지… 많은 생각이 드시겠습니다.
김수정>그러니 여기가 알고 보면, 어떻게 보면 분만과 고통의 산실이죠.(웃음)
정운갑>그러겠네요. 여기 앉아서 그때 어떤 아이디어 창출을 위해 엄청 고심하셨을 거 아니에요.
김수정>그렇죠, 여기에서 거의 전쟁을 치르다시피 했죠.
정운갑>(오프닝)<아기공룡 둘리>를 탄생시킨 둘리 아빠 만화가 김수정 작가 만나보겠습니다.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김수정>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정운갑>아기공룡 둘리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데는 시대의 아픔 때문이었다. 제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작가님 뵈니까 우선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건지 궁금합니다.
김수정>둘리가 나올 당시가 1980년대 초반이었거든요. 그리고 이제 제가 만화를 그린 것은 이제 1970년대에서부터 시작이 됐는데 세상에 쓰레기도 불량은 없어요. 그런데 만화에서는 늘 불량이라는 것이 무슨 상표처럼 따라다니던 시대였거든요. 그래서 이 만화를 그리게 되면 특히나 이제 아동만화를 그리게 될 때는 이 심의라든가 검열이 너무 심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검열이 심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아동들의 어떤 이야기를 그 아동들이 어떤 갖고 있는 동심이라든가 꿈을 이렇게 만화에서 표현하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이렇게 캐릭터 하였을 때는 제한이 너무 심해서, 그래서 동물을 상상하게 됐고. 동물을 이제 의인화하게 되면은 조금 심의가 완화돼요. 그렇다고 많이 완화되는 것도 아니고.(웃음)
정운갑>검열을 피해 동물을 의인화해 보자는 생각으로 여러 동물을 찾다가 공룡이 떠오른 거다, 이런 설명인데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쥬라기공원 1편을 보니까 개봉한 것이 1993년입니다. 그런데 김수정 작가가 둘리를 그린 게 1983년, 10년이 앞섰습니다. 당시 공룡에 누가 관심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공룡을 그려보자는 생각을 어떻게 해서 떠올리게 된 건지요?
김수정>이게 공룡이라고 그러면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하나의 공포의 대상이에요. 공룡은 무서운 것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근데 이제 이것이 이제 만화가의 발상이라는 거는 아무리 무서운 공룡도 아기가 되거나 이렇게 됐을 때는 천진난만하잖아요. 그래서 일단은 무서운 존재가 아기로 왔을 때 천진난만함, 거기에서 일단 차단했었고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부분에서 역발상, 뭔가 무서운 것이 무섭지 않게 우스운 것 그래서 둘리가 나오고 난 이후에 아이들이 사실은 공룡 알기를 우습게 알게 됐어요.
정운갑>책, 만화가 출간되기 전에 검열했다고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1980년대 당시 그린 만화 중에 검열돼서 강제 종료된 것도 있잖아요. 그 당시의 검열, 어느 정도였나요?
김수정>이것이 검열이라고 하면, 하나의 약 20여 개의 조항이 있었어요. 그 조항은 일반적인 조항인데 예를 들어서 거기에서 우리하고 우방 국가를 욕해서는 안 된다. 그다음에 서울의 판자촌을 그려서도 안 된다, 이런 식이었는데 왜 판잣집을 못 그리냐... 그런데 그 당시에 판잣집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못 그리게 한 이유가 예를 들어서 이 판잣집을 그렸을 때 북한에서 체제 선전을 이용한다. 그다음에 우방국은 무조건 좋은 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이것이 기본 항목이었고, 그다음에 이제 실제로 이 만화로 들어가게 되면은 이제 그건 이제 그 심의관들이 보는 견해에 따라서 다 달라지는 거예요.
정운갑>전두환 전 대통령 닮은 캐릭터를 그렸다가 문제가 됐다면서요?
김수정>그 만화는 약간 성인 만화였어요. 제목이 ‘아담과 이브’였는데 그것을 이제 주간지에 그렸는데, 사실은 이제 이주일 선생을 좀 패러디한 건데, 그 그림이 그 모양이 너무 그 당시에 그분하고 닮았던 거예요. 그래서 필화사건에 걸리면서 연재가 종료됐죠.
정운갑>만화야말로 창조잖아요, 이름을 왜 둘리라고 지은 거죠?
김수정>처음에는 둘리뿐 아니라 공룡을 두 마리를 설정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 둘 해서 둘리라고. 그래서 둘리 이름도 ‘둘이’라고 지었던 거예요. 둘이라고 하니까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 너무 딱딱한 것 같고 둘리의 성격에 따라서 둘이 하니까 조금 맹해 보이기도 하고, 만화적인 어떤 이런 느낌이 들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둘리라고 했었고요.
정운갑>아기공룡 둘리가 첫 선을 보인 게 1983년 4월. 국내 최초의 만화잡지 ‘보물섬’에 실리면서 잖아요. 그때 어떻게 연재하게 됐습니까? 그리고 있는 것을 알고 그쪽에서 요청이 들어온 건지, 아니면 직접 작가님이 전화한 건지요?
김수정>소위 이제 그 보물섬이 창간되면서 국내에서 내놓으라 하고 있는 작가들이 18명이 엄선돼서 들어간 거예요.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 저는 제 친구 따라서 그때 거기에 연대하고 있던 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어차피 할 일 없으면 같이 거기 가는데 놀러 갈래요?’ 그래서 따라간 거예요. 따라갔다가 거기서 어영부영 스카우트가 됐는데 그 보통 이제 그 연예인들 스타가 되신 분들이 무슨 오디션장에 친구 따라갔다가 된, 둘리가 그런 케이스였어요. 그래서 마침 갔는데 그 당시에 연재하고 있던 저희 선배 작가분께서 건강이 좀 안 좋으셔서 휴재를 들어갔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타로 제가 들어가게 된 거죠.
정운갑>처음에는 대타로 들어간 거군요. 그런데<아기공룡 둘리>가 ‘보물섬’에 공개되자마자 어린 독자들의 마음을 확 사로잡았잖아요. 그 같은 폭발적인 반응을 예상하셨는지 궁금하고요. 아울러 그렇게 인기몰이를 한 배경은 뭐라고 보세요?
김수정>단지 이게 캐릭터가 되기는 하겠다 하는 정도로 생각했었고, 그다음에 아마 이것이 지금까지도 그렇고 아이들에게 반응이 있었던 것 물론 작가가 나름 이런 데로 생각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딱 이것이 인기의 비결이다, 하고 다른 하기는 어려워요. 아마 이제 생각한 게 이제 여기에서 오는 그 사람들 그 둘리를 포함해서, 이게 꼭 둘리뿐만 아니라 그 사이드에 있는 캐릭터들도 같이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우리 삶의 모습이 여기에 이렇게 투영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하는 이런 생각은 들어요.
정운갑><아기공룡 둘리>를 그렸을 당시는 지금과 가정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고길동은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이미지잖아요. 아이들을 때리고, 소리 지르고... 오죽하면 둘리가 “어린이 때리지 말라” 이런 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고길동은 어쨌든 둘리를 집에서 살도록 합니다. 이런 설정은 어떻게 보면, ‘1980년대의 아버지들이 무뚝뚝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따뜻했다. 또 어려운 타인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뭔가 이런 시대적인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김수정>어떤 시대의 표현이라기보다도 그 당시 아버지 고길동 씨가 30대 후반에서 약 한 40대 그 사이에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의 모습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는 참 소시민적이면서, 그다음에 내 가족과 내 가정과 그다음에 성공을 위해서 뛰는 그 시대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이거든요. 고길동 씨가 실질적으로 자기 자제들은 이렇게 탓하거나 나무라거나 하지는 않아요. 여기에 둘리라든가 도우너라든가 또치라든가 이 사실 군식구들이잖아요, 객이잖아요. 여기에서 오히려 내 자식들은 굉장히 이렇게 참 온순하고 잘 크고 있는데, 굴러온 애들이 계속 애를 먹인단 말이에요.(웃음) 그래서 거기에서 오는 이제 불협화음이었죠.
정운갑>둘리가 어리고 약하고 엄마 생각하면 눈물도 뚝뚝 흘리는, 그렇지만 똑 부러지게 할 말을 하는 그런 캐릭터잖아요. 이런 에피소드는 어디서 착안했는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김수정>이제 아이들이 어떤 꾸어야 할 꿈을 좀 둘리를 통해서 대신 꾸게 해주고, 그다음에 또 둘리를 통해서 어떤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 왜냐면 애들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서는 좀 그 버릇없는 소리도 하고,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잖아요, 그렇죠? 근데 우리는 아이들을 계속해서 제어한단 말이에요. 누르거든요, 그러지 말라, 그러지 말라... 모든 것이 그러지 말라, 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만 하잖아요. 그래서 이것을 이제 둘리를 통해서 아이들이 갖고 있는 그 욕구, 그리고 그 꿈을 좀 발산하고 그다음에 그 꿈을 좀 그리게 해주자.
정운갑>둘리를 통해서 사회에 하고 싶은 얘기를 하신 거군요.
김수정>그렇죠, 그래서 시작된 거죠.
정운갑>김수정 작가님은 1950년생입니다. 전쟁 통에 태어났고 가정 형편이 많이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만화가가 되겠다고 해서 엄청나게 야단맞으셨다면서요? 그래서 신문팔이, 껌팔이, 아이스게끼 장사... 이런 걸 하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만화가가 꼭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어떤 거죠?
김수정>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만화를 처음 봤는데 만화를 보는 순간 그 만화에 대한 그 마력, 만화를 보는 순간에 완전히 제가 갖고 있는 제 안에 숨어 있던 재능도 발견이 됐고. 그러니까 그전까지만 해도 제가 그림을 잘 그리는지 이런 걸 몰랐었어요. 근데 어느 날 이제 형 따라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보고 돌아와서는 형들이 그때는 초등학교 다니고 중학교 다니고 했으니까 연습장 노트가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다 본 그것을 그리기 시작한 거예요. 그랬더니 옆에서 보면서 어른들도 그러고 ‘이놈이 그림을 참 잘 그린다’ 하고 이렇게 된 거예요. 또 주변에서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니까 계속 그리게 된 거예요. 기특해 보이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그 당시 시골에서 제 고향이 진주거든요. 경상남도 아주 먼 곳이에요, 서울에서. 그래서 이제 아버지가 이렇게 보면서 가만히 보니까 ‘이놈을 만화가를 시켜야 하겠다’ 하고 이제 그 생각을 하신 거예요.
정운갑>아버지는 그러면 응원해 주셨네요?
김수정>그렇죠, 그래서 굉장히 아버지가 큰 후원자가 되셨죠. 그랬는데 아버지가 제 중2 때 돌아가시면서, 아까 말씀하셨던 여러 직장을 전전하게 됐어요. 신문팔이도 하고, 우산 장사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면서 어쨌든 가계에 도움이 됐어야 되니까. 그러면서 이제 했었고. 그리고 이제 그러면서 제 만화가의 꿈을 계속 키워왔어요. 그런데 정작 제가 성인이 되고 난 뒤에 만화가가 돼야겠다고 하니까, 집안에서 이제 형들이 난리가 난 거예요.(웃음) 아까 이제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만화라는 것이 굉장히 좀 그 사회에서 그 인정도 못 받고, 어떤 불량의 어떤 대명사로 치부했던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거 말고도 만화 말고도 재주면 여기서 먹고살 게 많은데 왜 꼭 굳이 만화가가 되겠느냐는... 이것 때문에 참 많은 반대에 부딪혔죠.
정운갑>최근에 둘리 탄생 40주년을 맞아서 27년 전인, 그러니까 1996년 개봉했던 애니메이션<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이 재개봉됐잖아요. 어린이 관객이 당연히 있고 또 둘리를 보며 성장한 어른 관객도 많은데요. 관객들 틈에서 영화를 다시 보니까 어떤 감회가 밀려왔습니까?
김수정>처음에 이게 재개봉을 결정하고 배급사가 해보겠다고 그랬을 때,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반신반의했어요. 이것이 거의 30년 가까이 이게 27년 전의 작품이고. 그리고 그 당시에도 애니메이션이 우리 기술적으로도 완벽하지 않을 때였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27년이 지난 지금, 다시 지금은 모든 게 디지털 시대인데... 그랬는데 생각보다 관객 스코어가 이렇게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개봉하고 3일째 되는 날 제가 이제 극장에 몰래 갔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좀 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갔었는데(웃음), 가서 관객들 사이에서 봤는데, 생각보다는 어린이 관객들이 꽤 많았어요. 그것이 어린이가 자발적으로 온 것보다는 부모님들이...
정운갑>부모님들의 과거의 추억이 남아서 온 거죠. 둘리 탄생 40주년 계기로 영화도 재개봉됐고... 모처럼 둘리 얘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애니메이션 재개봉에 대한 꿈을 갖고 계시고요. 또 어떤 계획이 있는지요?
김수정>그리고 이제 제가 이제 2009년에 TV 시리즈를 이제 26편을 만들고, 그리고 이어서 이제 뭐 어떤 부분에서는 이제 ‘얼음별 대모험’의 후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극장용을 기획하고 제작 중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무산이 돼 버렸는데 최근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이 이야기를 지금 당장은 애니메이션은 안 되겠지만 이 이야기를 묵혀둘 것이 아니라, 출판 만화로 준비해야 하겠다, 해서 지금 현재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마 빠르면 뭐 내년쯤 출판 만화를 통해서 새로운 어떤 그 둘리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 찾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정운갑>곧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겠네요.
김수정>그렇죠.(웃음)
정운갑>40년 전, 둘리 탄생 배경에는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만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김수정 작가의 집념과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 의지로 ‘둘리’를 탄생시켰고,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에 ‘둘리’와 함께 웃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수정>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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