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지난 12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95회 아카데미 시상식. 주인공은 말레이시아 배우 미셸 요(양자경)가 열연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무려 7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이 영화의 특징은 바로 다중우주, 이른바 멀티버스(Multiverse)를 소재로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세계가 다른 우주에 있다는 것, 그 세계에도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는 이론을 차용한 겁니다.
앞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비롯한 마블 영화 시리즈에서도 멀티버스가 소재로 쓰이는 등 멀티버스라는 단어는 이제 크게 낯설지 않습니다.
↑ 유남석 헌재소장과 재판관들이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선고에 입장해 자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
그런데 이 멀티버스가 영화에만 있었던 건 아닌 듯 합니다. 지난 23일 헌법재판소의 '검수완박법' 권한쟁의 심판 결정문을 보면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은 두 개의 멀티버스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첫 번째 멀티버스는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네 재판관이 바라본 세계입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검사들의 청구는 ‘각하’되고, 국민의힘 의원들의 청구도 모두 '기각’되는 곳이죠.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한 이미선 재판관이 ‘법사위 통과 권한침해 확인’ 부분만 인용으로 의견을 달리했을 뿐 나머지는 네 재판관과 같은 의견을 내 대부분의 결정이 이들 재판관의 판단대로 됐으니 네 재판관을 편의상 ‘결정 재판관들’이라고 불러보겠습니다.
↑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사진=연합뉴스) |
결정 재판관들의 세계에서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없는 개념입니다. 오로지 헌법에 적힌 대로 ‘영장신청권’만이 헌법이 부여한 권한일 뿐이죠.
체포ㆍ구속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헌법 16조
주거에 대한 압수나 수색을 할 때에는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따라서 수사권은 행정부에 속하는 권한에 불과합니다.
-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 이미선 재판관
당연한 이유로 행정부의 권한인 수사권을 어느 기관에 나눌지 정하는 건 입법부 즉 국회의 권한입니다.
-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 이미선 재판관
따라서 검사의 수사 범위도 국회가 정해주는 대로 따르면 될 뿐입니다. 애초에 고유한 ‘검사 수사권’은 존재하지 않는 만큼 헌재에 시정을 요청해도 ‘각하’당하게 되죠.
이제 방향을 돌려 다른 멀티버스로 가 보겠습니다.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의 세계입니다. 통과되지 못한 반대 의견을 냈으니 ‘반대 재판관들’이라고 편의상 부르겠습니다.
↑ 이선애 헌법재판관 (사진=연합뉴스) |
반대 재판관들의 세계에서는 앞서 본 헌법에 나오는 ‘검사의 영장신청권’에 대한 해석부터 차이가 납니다. 영장신청권이 곧 수사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또 '영장신청권=수사권'을 행사하는 ‘검사’는 헌법이 부여한 고유 권한을 보장받은, 행정부와는 별개로 헌법 기관으로 인정받는 ‘준사법기관’입니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당연하게도 검사의 수사권을 헌법이 보장한 만큼 국회는 이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그런데 만약 국회가 검사의 수사권을 제한하는 검수완박법을 통과시킨다? 이는 헌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는 무효가 됩니다.
↑ 무소속 민형배 의원이 23일 오후 본회의를 마친 뒤 '검수완박' 탈당관련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두 세계에서는 민형배 무소속 의원의 탈당도 정반대로 취급됩니다.
먼저 결정 재판관들의 세계에서 민 의원의 탈당은 ‘합법’입니다
-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재판관
↑ 이석태 헌법재판관 (사진=연합뉴스) |
오히려 국민의힘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재판관
↑ 이종석 헌법재판관 (사진=연합뉴스) |
반면, 반대 재판관들의 세계에서 민형배 의원 탈당은 ‘위장탈당’입니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국회법도 위반한 걸로 취급됩니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결국 서로 정반대의 모습을 한 두 세계는 아래처럼 나타납니다.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없다
-수사범위는 국회가 정하는 것
-민형배 의원은 ‘합법탈당’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명시
-국회의 수사권 통제는 제한적
-민형배 의원은 ‘위장탈당’
↑ 이미선 헌법재판관 (사진=연합뉴스) |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양쪽 모두와 다릅니다.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한 이미선 재판관이 다른 결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죠. 앞서 본 바와 같이 검사의 수사권에 대해 이미선 재판관은 결정 재판관과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없다고 본 만큼 검수완박법은 유효하게 됐죠.
반면 민형배 의원의 탈당을 두고는 ‘위장탈당’이라는 반대 재판관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 이미선 재판관
그럼에도 이미선 재판관은 검수완박법을 ‘무효화’는 하지 않아야 한다며 결정 재판관들과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헌재가 아닌 ‘국회가 해결할 사안’이라는 이유입니다.
- 이미선 재판관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