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지난 10일 서울고법 413호 법정. 이날은 다섯명의 민사 사건에 대한 선고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미 확정판결이 난 건에 대한 '재심' 사건 선고였습니다. 몇년 전 이춘재 사건의 가해자로 억울한 누명을 썼던 윤성여 씨를 비롯해 많은 형사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대한 재심 선고가 이어지면서 이제 재심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단어가 됐습니다. 하지만, 법원이 확정판결을 내린 선고를 뒤집는 재심에서 승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전 재판이 잘못됐다는 엄격한 증거와 법리가 갖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날 민사 재심 사건은 모두 손해배상 사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유신정권 긴급조치9호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 여부였습니다. 다섯 사람은 한 번 하기도 어려운 '재심'을 두 번이나 했고 이날은 바로 '두 번째 재심'에 대한 선고였습니다.
1978년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기소된 A 씨는 당시 해군 소속 군인이었습니다. 당시 검찰 공소장에는 "A 씨가 평소 대한민국 헌법과 경제체제에 불만을 품고 군복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국회의사당 앞 벽에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벽보를 붙였고, 국회의사당 내부에도 벽보를 붙이려 하다가 경찰관에게 체포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유신 비판 벽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체포된 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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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사진=연합뉴스) |
1975년 유신정부가 선포한 긴급조치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를 할 경우 징역 1년 이상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 유언비어 유포 금지
- 집회·시위나 문서 등으로 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을 주장하는 행위
- 허가 없는 학생의 집회·시위
-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1년 이상 유기징역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A 씨는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고, 보통군법회의는 A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이 판결은 확정됐습니다.
1978년 역시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기소된 B 씨와 C 씨, D 씨, E 씨는 모두 같은 학교 대학생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소 유신체제에 불평불만을 품고 있는 자로서 광주 소재 대학 본관 앞 계단에 '유신독재타도'라는 글을 써서 유신체제가 독재체제인양 사실을 왜곡해 전파하고, 유신체제를 왜곡 표현한 표현물을 제작해 배포한 뒤 집회·시위를 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기소됐습니다.
이들도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가 인정돼 1979년 1심과 2심에서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습니다.
그리고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이후 2010년대 들어 이들은 모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잘못된 법에 따라 처벌받은 만큼 잘못된 처벌이었다는 걸 따지겠다는 것이었죠. 그 결과 2014년 A 씨의 재심을 맡은 서울남부지법은 "범죄가 되지 않는 사건으로 기소된 것"이라며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정부가 항소하지 않음에 따라 무죄는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B 씨와 친구들은 어땠을까요? 안타깝게도 B 씨는 명예회복을 하기 전 2003년 숨졌습니다. 그래서 같이 처벌받았던 C 씨와 D 씨, E 씨, 그리고 B 씨의 아버지가 함께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재심을 맡은 광주지법도 2013년 마찬가지로 "범죄가 되지 않는 사건으로 기소된 것이었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곧바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는 인정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는 데 30년여 년이 걸렸죠.
죄가 없는 사람을 가두고 처벌했으면 무죄를 인정받는 걸로 끝이 나지 않아야 할 겁니다. 잘못된 처벌을 한 국가가 책임을 지고 배상해야 하죠. 당연히 이들도 모두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2015년 서울중앙지법은 해군출신 긴급조치 9호 피해자인 A 씨, 학생출신 긴급조치 9호 피해자인 B 씨의 가족과 B 씨의 친구들이 낸 국가배상 청구를 모두 '각하'했습니다. 소송을 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왜일까요? 이미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A 씨는 2001년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뒤 2008년 생활지원금으로 1,000만 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숨진 B 씨의 가족도 비슷한 시기 1,600만원, C 씨는 1,400만 원, D 씨는 1,200만 원, E 씨는 1,400만 원을 생활지원금으로 받았습니다.
이를 두고 법원은 "재판상 화해의 효력이 발생한 걸로 본다"고 판단했습니다.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받았으니 정부와 피해자들이 화해한 걸로 불 수 있다 즉 손해배상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죠.
게다가 이들처럼 보상금도 받지 않았던 피해자들조차 대부분 손해배상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긴급조치9호의 책임은 '정치적'으로만 지는 것이지 민사적 책임까지 지는 건 아니라는 당시 대법원의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 2015. 3. 26. 대법원 선고
아울러 당시 법원은 지금은 위헌이 됐어도 긴급조치9호가 발령된 당시에는 그게 법이었던 만큼 그 법을 따라 수사기관이 피해자들을 구금하고 사법처리한 것도 책임져야 할 행위는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A 씨와 B 씨 가족, 친구들은 곧바로 항소했지만 2017년 2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1심과 같이 이들의 항소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법원 역시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긴급조치9호 피해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은 인정되지 못한 반쪽 명예회복 상태로 남게 된 것이죠.
A 씨는 국가배상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7년에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도 함께 냈습니다. 보상금을 준 걸로 국가의 책임을 다한 걸로 본다는 민주화보상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였습니다. A 씨 뿐만 아니라 많은 긴급조치9호 피해자들이 비슷한 헌법소원을 함께 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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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8년 8월 3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이진성 당시 헌재소장(가운데) 등 헌법재판관들이 '긴급조치 국가배상 부정' 재판 등과 민주화운동 보상법 사건·과거사사건 국가배상청구 소멸시효 사건 선고 등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그 결과 2018년 헌재는 민주화보상법 일부가 위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 2018. 8. 30. 헌법재판소 결정
즉 긴급조치9호로 인한 다른 손해는 보상한 걸로 인정하더라도 피해자가 받은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은 별도로 국가가 해줘야 한다는 판단을 헌재가 내린 겁니다. 이는 앞서 민주화보상법으로 국가와 피해자 간 화해가 된 걸로 본다는 법원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이었죠.
헌재의 판단이 나옴에 따라 A 씨는 2019년, B 씨의 가족과 친구들은 2021년에 각각 '두번째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은 바뀌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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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고등법원 (사진=연합뉴스) |
그렇게 재심의 결과가 앞서 언급한 지난 10일 법정에서 나오게 됐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서울고법 민사7부(강승준 부장판사)는 국가가 A 씨에게 2억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습니다. 또 숨진 B 씨의 가족에게는 1억 7,000만 원을, B 씨와 함께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처벌됐던 C 씨와 D 씨, E 씨에게 각각 1억 8,000만 원, 1억 9,000만 원, 1억 8,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습니다.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기존 판결을 뒤집고 국가 책임을 인정한 겁니다.
재판 결과가 뒤집히게 된 데에는 앞선 헌재의 판단이 영향을 줬죠, 여기에 대법원의 판단이 바뀐 점도 결정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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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지난 2022년 8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긴급조치 9호 피해자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 관련 전원합의체 선고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사진=연합뉴스) |
앞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은 2015년 대법원의 '정치적 책임'만을 인정한 판결 때문이었죠. 그러나 7년이 흐른 지난 2022년 대법원은 다른 판단을 내놨습니다.
- 2022. 8. 30. 대법원 선고
2015년 대법원 판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을 질 뿐, 잘못된 법으로 인한 모든 사법행위를 실천한 수사기관은 책임이 없다고 했죠. 그러나 2022년 대법원은 긴급조치9호 발령부터 이것이 적용된 모든 사법과정이 위법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도 생긴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A 씨 등에 대한 재심을 맡은 법원도 이런 판단을 적용해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습니다.
- 2023. 2. 10. 서울고법 재심 선고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체포된 뒤 형사재판 - 형사재판 재심 - 민사재판 - 헌법소원 - 민사재판 재심으로 이어진 기나긴 재판. 군인으로서 유신정권의 문제점을 비판한 A 씨와 대학생으로서 유신정권을 비판했던 B 씨와 친구들의 명예가 법정에서 회복되는 데 걸린 시간은 45년이었습니다.
다행인 점은 2022년 대법원 선고가 나온 이후로는 긴급조치9호 피해자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선고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사건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각하 판결을 내린 원심을 깨고 배상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이들 역시 민주화보상금을 받았지만 A 씨 등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배상할 책임
A 씨의 재심 선고가 나온 지난 10일 같은 법정에서는 국가룰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1심에서 각하 판결을 받은 긴급조치9호 피해자 60명에 대한 항소심 선고도 있었습니다. 법원은 A 씨 등과 마찬가지로 역시 국가의 배상책임이 인정된다며 1심을 깨고 국가가 이들에게 배상하라고 선고했습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