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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 2018년 5월 25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창립 3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사진 제공 = 민변] |
고인은 1934년생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청소년기 한국전쟁을 겪었다. 전후 1950년대 전북대 정치학과를 다니다가 1957년 고등고시(현재의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검사로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해 5년간 부산지검, 서울지검, 법무부 등에서 근무하다 변호사로 개업했다.
군부독재 아래 엄혹했던 시기, 탄압받는 양심수·시국사범 변호와 민주화·인권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생전 1974년 민청학련사건(대통령 긴급조치 4호)의 희생자 여정남 군을 특히 잊지 못해 했다고 한다. 그가 변호를 맡은 수많은 시국 사범 중 사형 집행까지 당한 피고인은 여군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긴급조치 시대상을 풍자한 '정찰제 판결'이라는 그의 어록은 널리 회자됐다. 군 검찰이 기소하고 구형을 하면 바로 다음날 군법회의에서 그대로 같은 형량이 선고되는 현실을 두고 그는 "한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닌 삼각지 군법회의에서 확립되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시국사건을 맡으며 직접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75년 '필화 사건'에 연루된 김지하 시인의 재판을 맡지 말라는 요구를 거부한 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고 반공법으로 기소돼 9개월가량 수감 생활을 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돼 고문을 당한 뒤 군사재판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변호사 자격이 박탈됐다가 8년 만에 복권돼 계속 시국사건 변호사로 활동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제도권에서 국민에 의한 사법 기틀 마련에 헌신했다. 1998년 김대중정부에서 17대 감사원장으로 임명돼 이듬해 정년퇴임하기까지 공직사회 부패척결에 힘썼다. 2005년 노무현정부에서는 사법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아 사법제도 개혁에 앞장섰다. '국민에 의한 사법'을 강조하며 배심제도 도입에도 앞장섰다. 그는 생전 "모든 국민이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법치주의의 올바른 모습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불리지만 고인은 그 단어를 싫어했다고 한다. "변호사는 원래 인권을 지켜주고 찾아주는 것이 직분인데 거기에 '인권변호사'라고 붙이면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고인은 생전 말했다. 그의 호 산민은 '근재
[이윤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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