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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연합뉴스] |
유족 측은 이어령 전 장관이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이날 밝혔다.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지만, 말기 췌장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마지막에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했다. 체중이 크게 줄고 수척해지면서 가족들에 따르면 올해 들어서는 본인 스스로 하던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있던 상태였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고인은 한국 사회에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거인이었다. 60년 동안 쉼 없이 지성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한국 사회를 일깨워왔다.
1933년 충남 온양에서 출생(호적상 1934년생)한 고인은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했다. 1960년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1972년까지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1972∼1973년에는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으로 활동했다.
1966년부터 이화여대 강단에 선 이후 1989년까지 문리대학 교수를, 1995∼2001년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2011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됐다. 30여 년간 이화여대에서 국문학도를 가르쳤다.
이 전 장관은 문학평론가로 가장 먼저 이름을 떨쳤다. 22살의 젊은 나이에 '우상의 파괴'라는 글을 써서 문단 권력을 정면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문단의 거두였던 소설가 김동리, 모더니즘 시인 조향, 소설가 이무영을 각각 '미몽(迷夢)의 우상', '사기사(詐欺師)의 우상', '우매(愚昧)의 우상'이라고 비판한 글이 한국일보 논설에 실리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게 됐다. 시인 김수영과의 '불온시' 논쟁에서 격렬한 글 사위를 주고 받기도 했다. 문학의 현실 참여를 두고 문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창작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 언론을 통해 난타전을 벌인 것이다.
수십여개의 직함을 가지고 살았던 고인이지만 무엇보다도 '문학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2015년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는 "나는 학자가 아니었다. 문학하는 사람이었다. 그 문학을 대학에서 강의한 거다. 문학만이 세상만사를 설명할 수 있다. 문학은 자연도 다루고 윤동주처럼 별도 노래한다. 세상에는 문학의 대상이 아닌 게 없다"라고 말했다.
60년 이상 평론과 소설, 희곡, 에세이, 시, 문화 비평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방면의 글을 써왔으며, 대표 저서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지성에서 영성으로',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생명이 자본이다', ; '가위바위보 문명론', '보자기 인문학' ,'언어로 세운 집' ,'지의 최전선' 등이 있다.
문화예술 행정가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6공화국 때 문화공보부를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함에 따라 1990년 출범한 문화부의 초대 장관에 임명됐다. 장관을 지내며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을 총괄 기획했다. 냉전이후 처음으로 양 진영이 참가하면서 화해의 장을 열 수 있는 올림픽에서 그는 전세계에 '벽을 넘어서'라는 구호를 외쳤다. 한국 전통의 '여백의 미'를 살린 기획이 개막식에서 등장한 굴렁쇠 소년이었다. 이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발전된 한국의 모습은 전쟁고아의 이미지에 불과했던 한국의 인상을 새롭게 바꾸어놓은 이벤트로 기억된다.
지난 10월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조시(弔詩)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로 추모하고 국가장의 유족 측 장례위원에도 고인은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기획하고 이끌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북한산 자락의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를 열고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집필활동을 통해 시대에 화두를 던져왔다.
말년에도 여러 권의 대화록을 출간하면서 세상과 꾸준히 소통해왔다. 2015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대뜸 '은퇴 선언'을 하면서 "모든 공적인 직함을 내던지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던 그다. 그는 "나에게 지금까지는 죽음이 생과 함께 있었지만, 이제는 죽음과 직면했다. 오늘 할 수 있는 일들에만 전력투구하겠다. 지금 쓰고 있는 책만 10종이 넘는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에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지난 1월 24일 출간된 대화록 '메멘토 모리'는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됐다. 이 시대의 지성이,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마지막 질문에 답한 책이다. 신과 종교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묻는 24가지 질문에 답하며 그는 코로나19가 찾아온 세상을 "코로나의 창궐에 대해서는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것이며 죽음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고 봐야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어령은 "코로나19를 통해 메멘토 모리를 다시 깨닫게 된 것"이라면서 "기독교에서 제일 큰 죄악이 인간의 오만이다. 우리는 인간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았다. 전 인류가 이 세상 모든 가치 가운데 생명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유족 측은 5일간 가족장으로 치를 계획이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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