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씨의 범행 4일 전, 경찰 대면했지만 조치 없어
경찰 "긴급 체포 잘못해 직권 남용 되는 사례 많았다"
경찰청장 "업무는 폭증하는데 똑같은 인력으로 대응해야"
↑ 교제했던 여성의 집을 찾아가 가족을 살해한 이모씨가 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
전 여자친구 A씨의 집을 찾아가 가족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구속된 이모 씨는 범행 4일 전, 경찰과 대면했었습니다. '딸이 감금된 것 같다'는 A씨 아버지의 신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찰은 범행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이모 씨를 풀어줬고, 이모 씨는 4일 후 A씨의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은 "긴급 체포 요건이 아니었다"고 밝혔습니다.
↑ 사진 = 연합뉴스 |
경찰 관계자는 오늘(13일) "피의자가 임의동행에 임했고 휴대폰 임의 제출도 순순히 했기 때문에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주거지나 전화번호 등을 확보했기 때문에 체포 영장을 받기 위한 긴급성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긴급 체포를 하려면 긴급성, 상당성, 중대성이 있어야 하는데 긴급 체포를 잘못해서 직권 남용이 되는 사례가 많다"며 "현행범 체포를 하려고 해도 범행 중이거나 (범행 직후) 바로 체포해야 하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상황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긴급 체포든 현행범 체포든 각각의 요건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어 이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퍼즐을 맞춰보니 그 때(A씨 아버지의 신고 당시) 체포를 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그 당시 판단하고 파악했던 것으로 체포 요건이 안 됐다"고 강조하며 "밝혀진 모든 사실에 대해 한 점의 의심 없이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모 씨가 범행을 저지른 건 지난 10일 오후 2시 26분쯤입니다. 이모 씨는 전 여자친구인 A씨의 집을 찾아가 A씨 가족에게 흉기를 휘둘렀습니다. 이로 인해 A씨 어머니는 숨지고, A씨 남동생은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입니다. 사건 당시 A씨는 집에 없어 화를 면했습니다. 이모 씨는 범행 후 도주해 옆 건물 2층에 숨었지만, A씨 아버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이모 씨를 찾아내 현행범으로 체포했습니다.
해당 사건이 발생 후 A씨 가족의 참변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됐습니다. 사건 발생 4일 전인 지난 6일 A씨의 아버지는 경찰에 '딸이 감금된 것 같다'고 신고했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A씨의 소재 파악에 나섰고, 대구에서 A씨와 이모 씨를 찾아냈습니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성폭력 피해를 호소했지만, 이모 씨의 진술과 상반된다는 점과 범행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이모 씨는 별다른 조처 없이 귀가 초지 됐습니다.
이후 이모 씨의 주거지 관할서인 충남 천안 서북경찰서로 해당 사건은 이첩됐고, A씨에 대해서는 스마트 워치 지급 등 신변 보호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이모 씨에 대한 경찰 후속 조사가 이뤄지기 전, 이모 씨는 A씨 집을 찾아가 A씨 가족에게 흉기를 휘두른 겁니다.
이모 씨는 A씨의 집 주소를 '흥신소'를 통해 파악했으며, 흉기를 미리 준비한 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모 씨는 경찰 조사에서 "애초에 가족을 노린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지만, 경찰은 해당 진술과 달리 이모 씨가 치밀하게 보복 범행을 계획한 것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법원은 범죄 혐의가 소명됐고, 도망할 염려가 있다며 이모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이모 씨는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나온 자리에서 '보복 살인을 한 것이 맞느냐'는 질문을 받고 "죄송합니다"라고 짧게 답했습니다. '흉기는 왜 준비한 건가' 등 기타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일절 답하지 않았습니다.
↑ 김창룡 경찰청장 / 사진 = 연합뉴스 |
김창룡 경찰청장은 위 사건에 대한 입장을 처음으로 내놓았습니다.
김 청장은 이날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에서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면서도 "국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기본 사명이고 그 역할을 충실 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며 "이번 사건으로 국민들에게 걱정과 불안을 드려 송구하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앞으로 더더욱 면밀하게 점검하고 확인해 문제점을 보완하고 발전시켜서 아까운 희생이 헛되지 않게 국민 안전을 위한 책임을 다해 나가겠다"고도 했습니다.
김 청장은 해당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하면서도 신변 보호 제도와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김 청장은 "신변 보호 요청 건수도 지난해 1만 4700건에서 올해는 2만 건을 넘어 연말에는 최소 55%가 증가하는 등 추세가 더 확대될 것으로 본다"며 "스마트 워치 SOS 신고 시 직장과 피해자 집에 동시 출동하도록 지침을 바꾸면서 경찰의 치안 부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경찰이 제공할 수 있는 신변 보호 조치 수단과 방법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신변 보호와 현실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며 "경찰이 긴급 응급 조치를 하더라도 불응하면 과태료 처분밖에 할 수 없고 잠정 조치 4호가 도입 돼도 강제 조치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덧붙여 "24시간 경찰이 피해자를 동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고 현행법으로는 경찰이 가해자를 실효적으로 초기 조치하는 수단이 제한돼 있다"고도 했습니다.
김 청장은 "업무는 폭증 하는데 똑같은 인력과 똑같은 조직으로 대응을 해야 한다"며 "직원들에게 철저하고 신속한 대응을 강조하고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반복하고 있지만, 신변 보호 조치가 실효적으로 이뤄지려면 제도적인 뒷받침과 예산, 시스템 등이 동시에 검토되고 확충 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윤혜주 디지털뉴스 기자 heyjude@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