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효자동 자택에서 김병호 전 서전농원 회장과 김삼열 여사가 부부의 모습을 본뜬 동상 옆에 다정하게 서 있다. 벽에는 집안의 가훈인 `근위무가지보(근면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다)` 여섯 자가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김 회장 부부는 13년 반을 경기 용인의 삼성노블카운티에서 지내다 지난해 2월 효자동으로 ... |
김병호 전 서전농원 회장(80)과 부인 김삼열 여사(71)는 소유 재산의 8할 이상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들의 선택에 만족한다. 김 회장 부부는 2009년과 2011년에 각각 경기 용인 소재 부동산(300억원)과 남양주 부동산(50억원)을 KAIST에 기부했다. 해당 부동산을 지금까지 소유했다면 그 가치는 6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둘은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말한다. 갖은 고생 끝에 일군 재산이 더 값지게 쓰이는 데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김 회장 부부의 서울 효자동 자택엔 선행을 기념하는 상패와 감사패 등이 즐비하다. 텔레비전 위 액자엔 KAIST 대덕캠퍼스 '김병호·김삼열 IT 융합빌딩' 전경이 담겼다. 부부의 기부금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김 회장은 "이 건물은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KAIST를 방문할 때 헬리콥터가 착륙하는 자리에 지어졌다고 한다"며 "KAIST에서 최고로 큰 건물에서 우리나라 미래를 책임질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뿌듯하다. 나는 촌놈이지만 융합빌딩 사진만 보면 다 잊는다"고 말했다. 김 여사는 "북쪽(North) 1번 건물이란 뜻에서 건물번호가 'N1'이라 붙었다. 우리는 '넘버원(No.1)'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부부는 2006년 7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13년 반을 경기 용인의 시니어타운 삼성노블카운티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이웃들과 기부로 이어진 인연을 맺었다. 최근 KAIST에 200억원을 기부한 장성환 삼성브러쉬 회장과 안하옥 여사도 그런 인연이다. 김 회장은 "장 회장께서 마음을 정하기까지 10년간 고민하셨다. 최근에 연락했더니 '기부하고 나니 오히려 기쁘다'고 하셨다"며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 기부자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노블카운티에서 기부 소식은 같은 뜻을 가진 이웃들을 이어주는 계기가 됐다. 장 회장 소식을 들은 손창근 회장은 서로 모르는 사이었음에도 장 회장에게 전화해 "잘하셨다"고 했다. 지난해 국가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수묵화 '세한도'를 기증한 손 회장과 김연순 여사도 2017년 김 회장 부부의 권유로 KAIST에 51억원을 냈다. 김 회장 부부는 "손 어르신은 먼저 연락하시는 일이 드물다. '잘했다'는 한마디가 얼마나 큰 말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말했다.
고(故) 조천식 한국정보통신 회장과 윤창기 여사는 김 회장의 기부 소식이 알려진 2009년 당시 김 회장을 가장 먼저 찾은 이웃이다. 김 회장은 "추석을 지내고 돌아오니 조 회장께서 찾아와 기부에 대해 물으셨다. 집에서 차를 대접하고, 발전기금 약정식 사진첩을 한 아름 드렸다. 이후 조 회장은 서남표 총장을 뵙고 비전에 감동해 기부를 결심하셨다"고 말했다. 조 회장 부부는 2010년·2012년에 160억원을 KAIST에 기탁했다.
고액기부자로 이름을 올린 부부 네 쌍을 포함해 노블카운티에서 11명이 기부에 동참했다. 이들 중 KAIST와 직접적인 연고가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재산을 환원한 이유는 한결같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인재 양성기관 아닌가. KAIST가 잘돼야 우리나라가 부국강병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김 여사는 "기부자들이 바라는 건 하나다. 기부자들의 뜻을 헤아려 기금을 '누수' 없이 알뜰히 사용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고 했다.
'버는 것은 기술이고, 쓰는 것은 예술이다.' 김 회장의 인생은 이 한 문장에 담겼다. 1957년 17세의 나이로 760환(통화개혁 전) 들고 전북 부안에서 상경해 식당일, 기름 장사, 세차, 버스 운수업 등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며 어렵게 모은 재산을 예술처럼 썼다. 아들이 초등학생이던 때부터 김 회장은 가진 것을 모두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살아오며 사회에 진 빚을 이자까지 얹어 갚는다는 마음이었다. 김 회장 부부의 KAIST 기부 소식이 알려지자 어느 이웃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린 참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김 회장 부부의 '기부 바이러스'는 이미 전국에 널리 퍼졌다. 김 회장 부부가 2005년 10억원을 쾌척한 부안군 근농(根農)인재육성재단엔 현재 기탁금이 약 200억원 모였다. 한 달에 1만원씩 내는 이들을 포함해 매월 고정 기부자는 약 7000명에 이른다. 김 여사는 "전남 순천에서 지내는 친구마저 3년째 부안군에 매달 1만원씩 기부한다"고 말했다.
근농장학재단은 2004년 김 회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당시 김종규 부안군수가 병문안을 왔던 날 밑그림이 그려졌다. 김 회장이 결식아동을 지원하고 싶다고 말하자 군수는 차라리 장학회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 여사는 "마침 통장에 3억원이 있다"며 "현금으로 내는 거라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 지금 바로 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이체했다. 이후 7억원을 추가로 마련해 재단에 기탁했다.
부부의 기부 바이러스는 국경 너머로도 퍼졌다. 김 회장은 1987년 8월 부친상을 치르고, 김 여사의 제안에
[문광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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