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7일)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은 최연소 주교로 발탁돼 42년간 청주교구·서울대교구장을 지낸 한국 가톨릭교회의 대표 인사입니다.
정 추기경은 어린 시절 발명가를 꿈꿨으나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고서 사제의 길을 택했습니다. 언제나 책과 가까웠던 그는 60년 사목 활동 중에도 독서와 집필을 놓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현직에서 떠난 뒤로는 매년 책을 내는 학자형 신부였습니다.
그가 20년 가까이 교회법전을 번역하고 해설서를 펴낸 일은 한국 가톨릭계에 큰 자취로 남아 있습니다.
천주교계에 따르면 1931년 12월 2일(호적상 7일) 서울 중구 수표동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나흘만인 6일 '니콜라오'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당시 명동성당 사목회장이었을 만큼 집안 신앙생활은 깊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비교적 부유했던 외가에서 자란 그는 당시 서울 명동의 계성보통학교에 다닐 때 책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근 소공동에는 일본인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다양한 책을 접했고 이때 발명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는 중앙중학교를 거쳐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발명가, 과학자의 길로 한 걸음 다가섰으나 불과 두 달 만에 터진 전쟁은 그와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습니다.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가 정 추기경의 회고를 토대로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했던 '추기경 정진석'에는 그가 겪은 전쟁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정 추기경은 1950년 9월 6촌 동생과 함께 은신해있던 집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만 폭격으로 무너져내린 서까래에 동생이 숨지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충격적인 사건은 그에게 동생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불러왔고, 후에도 그는 동생의 안식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정 추기경이 사제가 되기로 한 데에는 책 한 권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역서이기도 한 '성녀 마리아 고레티'입니다.
한국전쟁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됐던 정 추기경은 미군 통역병으로 일하며 알게 된 미군 군종 신부의 책장에서 이 책을 가져와 읽게 됐고, 성녀의 행적에 사제의 길을 갈 것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1954년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61년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신자들과 함께하는 신부로, 신학교 교사로, 교구장 비서로 봉직한 그는 1968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떠납니다. 후일 교회법 전문가로서 길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1년 반 만에 교회법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방학 때 미국 교회를 방문하는데 이곳에서 자신이 주교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당시 만 39살이었던 그가 최연소 주교가 된 것입니다. 그는 1970년 가난하고 힘들었던 청주교구장에 취임했습니다.
정 추기경은 첫 사목 표어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었습니다. 주교로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겠다는 의지로 해석됩니다.
그의 적극적인 사목활동으로 1970년 4만8천 명에 그쳤던 교구 신자 수는 1990년 8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가 서울대교구장으로 부름을 받은 건 1998년입니다.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정년을 맞아 교황청에 사직서를 내자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이었던 그가 후임 교구장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그는 2012년까지 14년간 서울대교구장을 지내며 여러 변화를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뒤로 신부들의 투표로 교구 지구장을 선출토록 해 지구 중심의 사목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2000년에는 교구 시노드(synod)를 개최했습니다. 시노드는 교리와 규율 등을 전반적으로 토의하는 자문기구 성격의 교회 회의체입니다. 교구 시노드는 1922년 열린 이후 약 80년 만에 다시 개최된 것입니다.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장 때부터 생명을 사목활동의 맨 앞에 뒀는데, 2005년 비로소 생명 운동을 본격 추진할 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이를 통해 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 뜻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습니다.
생명 운동의 연장선에서 그는 일찌감치 장기기증을 서약했습니다.
2006년 서울대교구 성체대회 당시 공개적으로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을 약속하는 사후 장기기증에 서명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 사제 중 600여 명이 교구장이었던 정 추기경의 뜻에 함께했습니다.
그는 2010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관련 발언으로 설화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책 출간을 겸한 기자간담회에서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듯한 발언이 내부적으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당시 원로 사제들은 정 추기경의 용퇴를 촉구하는 등 한바탕 홍역을 치렀습니다.
정 추기경의 생애를 돌아볼 때 교회법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제가 된 뒤 신학교 교사를 하며 라틴어를 익혔던 정 추기경은 1968년 로마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교회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유학 시절 라틴어-일본어 대역판 교회법전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는 그가 라틴어 교회법전을 한국어로 번역하겠다는 결심을 세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청주교구장으로 있던 1983년 교회법 번역위원회를 출범하고, 교회법을 전공한 사제 10여명과 함께 교회법전 번역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장도(壯途)는 1989년 라틴어-한국어 대역판 교회법전을 내놓으며 결실을 봤습니다.
그는 역작을 낸 뒤로도 교회법을 쉽고 정확히 알리고 싶었던 바람을 놓지 않았습니다. 교회법 해설서를 틈틈이 쓰기 시작해 2002년까지 총 15권짜리 교회법 해설서를 완간했습
정 추기경은 매년 책을 쓰는 신부로도 유명했습니다.
1955년 '성녀 마리아 고레티'를 시작으로 그가 우리말로 번역한 역서는 13권입니다. 저서로는 1961년 낸 '장미꽃다발'부터 2019년 쓴 '위대한 사명'까지 45권에 이릅니다. 50권을 훌쩍 넘는 집필의 힘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독서에서 비롯됐습니다.
[디지털뉴스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