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은 약 3만8000명의 부랑인들이 수용됐던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입니다. 수용자 대부분은 부랑인이 아닌데도 본인 의사에 반해 강제로 수용됐습니다. 노역과 구타 끝에 최소 513명이 사망하는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했습니다"
지난 10월 1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고경순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은 입을 뗐다. 법정에는 40여명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31년 만에 다시 열린 재판을 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고 검사장은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이 여러 혐의로 기소됐으나 세 번째 상고심 끝에 특수감금 혐의에는 무죄가 확정된 과정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피해자들이 감금당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우리 사회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라며 말을 마쳤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의 대표적인 강제실종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맺고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운영된 부랑인 강제수용시설이다. 국고 지원금을 더 받기 위해 부랑인 선도 명목으로 거리에서 사람들을 잡아 와 수용했다. 피해자들에게는 구타와 감금 등이 자행됐다. 피해자 실태조사 기록에 따르면 513명이 폭력과 고문으로 사망했다. 일부 주검은 암매장되기도 했다. 박 원장에게는 국고보조금 횡령 등 일부 혐의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2년 6월이 확정됐다. 2018년과 2019년 검찰은 이 사건 판결에 위법이 있다며 비상상고를 했다. 비상상고는 확정 판결을 다시 심리하게 하는 비상구제절차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가 사건을 배당받아 심리를 진행하고 있다.
정부가 피해자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까. 13일 법무부는 UN '강제실종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강제실종보호협약)' 가입을 위한 이행입법위원회를 구성하고 법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24일 이행입법위원 위촉식을 열고 두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내년 중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이어 "관련 외국법을 연구하는 등 관련 작업을 해 왔으나 자체 인력만으로 결론을 낼 수 없다고 판단해 이행입법위를 구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강제실종보호협약은 공권력의 허가나 묵인 아래 사람을 구금·납치하고 생사를 은폐하는 '강제실종'으로부터 모든 사람이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국제인권협약이다. 1960년대에서 7~80년대에 이르기까지 과테말라 등 남미 독재정권은 체제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납치·살해했다. 1980부터 2006년 사이에만 전세계 100여국에서 5만건이 넘는 강제실종 사건이 UN에 진정됐다고 한다. 실제 사건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2006년 12월 UN 총회는 강제실종보호협약을 표결 없이 채택했다.
협약에는 강제실종을 범죄를 저지르거나 명령한 자, 하급자의 범죄 행위를 알고도 무시한 상급자에게 형사책임을 부과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피해자 지원과 국제 공조, 범죄인인도 관련 조항도 포함돼 있다. 법무부 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외교부에서 비준 절차를 거쳐 협약에 가입하게 된다.
한국에서 현재 강제실종 범죄가 일어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강제실종보호협약 가입이 인권국가로서의 선언적 의미와 향후 피해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법률분석관은 "국제적으로 강제실종을 범죄로 간주하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에 목소리를 낸다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아시아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나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이런 국가들에게도 강제실종을 근절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아직 행방과 생사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강제동원 피해자가 많다. 일본 정부에 해결을 적극 요구하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향후 이행입법위에서는 협약 가입을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형사 처벌 뿐 아니라 피해자 보상과 범죄인 인도 등 여러 내용이 담겨 있어 형법 개정에 그칠 것이 아니라 특별법 형태로 도입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부는 지난 2017년 11월 다른 UN 회원국의 강제실종보호협약 비준 권고에 지지를 표명했다. 2018년 5월 인권위는 법무부와 외교부가 가입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에는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정희영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