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의 한 야산 벽돌건물에는 한국서 보기 어려운 높이 6.5m짜리 제단(祭壇) 하나가 있다. 바티칸 교황청도 애찬한 바로크 종교미술가 갈레리아 A. 파라의 대작(大作)이다. 저 금빛 성물을 한국에 들여온 주인공은 홍갑표 중남미문화원 설립자(86)다.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있는 중남미문화원은 30여 년간 멕시코, 코스타리카 등 중남미 국가에서 외교관을 역임한 이복형 전 주멕시코 대사(88)와 그의 부인인 홍갑표씨가 지난 1994년에 설립했다. 박물관 주제도 희소하거니와 구색이 탄탄한 소장품으로 마니아층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찬사를 오래전부터 듣고 있다. 홍 설립자가 2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박물관협회 주최 '자랑스런 박물관인' 시상식에서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그간 고생 많았다고 늙은이 죽기 전에 주는 상"이라며 손사래 치는 홍 설립자를 전날인 20일 파라의 제단이 놓인 종교전시관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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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남미문화원을 세운 홍갑표 설립자(86)가 지난 20일 오후 원내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 정원의 잡초 뽑기나 청소는 전부 홍 설립자와 남편 이복형 전 주멕시코 대사(88)의 몫이었다. [김유태 기자] |
1967년 남편이 멕시코 발령을 받았다. 부부는 코스타리카, 도미니카공화국, 엘살바도르, 아르헨티나, 니카라과, 벨리스 등지에서 마주치는 소도시가 좋았다.
돈은 없었지만 벼룩시장에 헐값에 나오는 골동품에 매료됐다. "엘살바도르 게릴라전(戰) 와중에 도망가기 전의 유력인사에게 골동품 구하겠다고 산속에 쫓아갔다가 남편에게 혼나기도 했어요. 그런 유물 귀하게 모셔와 그 나라 알리는 문화원 남겼으니 우리 부부는 아직 민간 외교관이지,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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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남미문화원 종교전시관 내부 모습. 예배당 의자와 액자 작품, 스테인드글라스 하나까지 전부 중남미에서 들여돈 작품이다. [김유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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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전시관의 설계 당시 모습. 홍갑표 설립자가 그리고 지우며 직접 외관을 만들었다. 벽돌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렸다. [김유태 기자] |
"이 검은 바지는 만원, 상의는 7000원이었던가. 비싼 옷 한 벌 없어요. 남편 퇴직금 일시금으로 받아 문화원에 다 쏟았으니 33년 공무원 생활에 연금을 못 누렸습니다. 허나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보다 풍성하게 존재함이 삶의 좌우명이에요. 문화도 그렇습디다. 가질 때 아니라 나눌 때가 진짜 소유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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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갑표 중남미문화원 설립자와 남편 이복형 전 주멕시코 대사가 문화원 내 집필공간에서 기자에게 줄 책에 사인을 하고 있다. [김유태 기자] |
"여긴 내게 눈물의 씨앗이었습니다. 맨날 울고 또 울고···. 근데 지나고 보면 고난도 축복이었어요. 내 삶이 그걸 증명합니다. 40년 전 심은 묘목이 군락을 이루고 오는 손님들 하나같이 '마니아'가 돼주시니 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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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갑표 중남미문화원 설립자가 종교전시관 앞에서 한 소나무를 가리키고 있다. 홍 설립자는 "내가 죽으면 여기에 조용히 수목장하고 떠날 것"이라고 고백했다. 홍 설립자가 직접 심은 묘목이 3m 높이로 자랐다. [김유태 기자] |
"여기 문화원도 재단법인 만들어 사회에 환원했으니 갈 때도 조용히 가렵니다. 완전히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 문 열어놓고 죽어야 잘 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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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갑표 설립자의 손. "평생 문화원 잡초를 뽑다 양손 검지와 중지가 모두 휘었다"며 웃었다. [김유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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