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처럼 돼지가 글을 쓸 수 있다면 지금 이 시기를 아마도 이처럼 기록할지 모른다. 과언이 아니다. 농담은 더더욱 아니다. 21세기 지구 도처에는 현재 보이지 않는 유령 하나가 떠돌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하 ASF)라는 유령이.
때는 2018년 8월. 중국 정부가 ASF에 걸린 첫 돼지 사례를 공개했다. 그러고 1년이 흐른 지금, 대륙의 돼지 1억마리 이상이 절멸한다. 하나 같이 ASF로 인한 페사거나, 방역 차원에서 살처분된 것이다. 이웃나라 베트남 또한 암담하다.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이 나라에도 지난 2월 한 농가에 ASF 첫 사례가 나오더니, 지금껏 500만마리가 몰살됐다. 불과 8~9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요컨대 14세기 인류사에 '흑사병'이 있었다면, 21세기 돈류사(豚類史)엔 'ASF'가 있다.
사태는 여전히 악화일로다. 최근 마크 시프 세계동물기구(OIE) 회장은 아예 묵시록의 예언자처럼 말했다. "전 세계 돼지 개체 중 최소 4분의 1이 ASF로 인해 사라질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 세계 양돈 농가에서 기르는 사육 돼지수는 약 9억 6000마리(2017년 기준). 시프 회장 예언이 맞다면 어림잡아 2억 4000만 마리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는 소리다.
한국은 어떠할까. 앞선 사례들에 견주면 그리 심각해보이진 않는다. ASF에 감염된 사육 돼지는 지난달 9일 14번째 확진 이후 추가 사례가 없다. ASF 잠복기는 통상 4일에서 19일. 그러나 문제는 멧돼지다. 돼지 농장 확진이 한달째 잠잠하다면 ASF가 검출된 멧돼지 폐사체는 지금껏 20마리로 늘었다. 양상이 사육 돼지에서 야생 멧돼지로 옮겨붙은 것이다. 안심은 금물이라는 얘기다.
최근 경북 김천 농림축산검역본부를 찾아가 강해은 해외전염병과장을 만났다. 서울대 수의학과를 나와 동대학원 수의면역학 박사를 받은 그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ASF 여성 전문가다. 국내 박사 학위 취득 후 미국 캔터키대 박사후 연구원(2006~2011년), 콜로라도 주립대 수석 과학자(2011년~2016)를 거친 그는 2016년 3월부터 농림축산검역본부 해외전염병과장으로 뛰고 있다. 그는 "지난 9월 국내 첫 보고를 받은 이래 밤낮 없이 ASF와 싸우는 중"이라며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고 했다.
―국내 사육돼지에 한해 ASF 발병이 좀 사그라든 것 같다.
▷양돈 농장주들의 발빠른 조기 신고 덕이다. 다른 나라들은 양돈 돼지 중 30~40%가 폐사돼야 신고할 만큼 초기 신고가 늦었다. 중국이나 베트남 등이 그렇다. 반면 우리는 돼지 몇 천두(頭)를 키우고 있는 양돈가에서도 의심 개체 3~4마리만 보이면 바로 조기 신고를 해주셨다. ASF는 호흡기가 아닌 접촉으로 전파된다. 퍼지는 속도가 구제역과 조류 인플루엔자(AI)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다. 양돈 농가 주민들이 ASF 대응 메뉴얼에 따라 신속히 대응해 주셨고, 정부가 강력한 살처분과 수매 정책 같은 특단의 방역 조치를 취한 것이 더해져 어느정도 조기 컨트롤이 됐다.
―그러나 야생 멧돼지 폐사체는 지금도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이로 인한 ASF 전국 확산 위험은 없나.
▷없을 것이다. 절대로 그래선 안 되고. 다만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한국에 서식하는 여생 멧돼지가 약 30만마리다. 사육 돼지와 달리 멧돼지는 움직인다. 그만큼 컨트롤이 어렵다. 장기적 감시와 검사 시스템이 중요하다.
―ASF 청정국이던 한국조차 방역 체계가 뚤린 배경은 뭐라고 보나.
▷돼지 농장에서 첫 사례가 보고된 후 역학조사로 철저히 유입 경로를 밝혀내고 있었다. 기준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제시한 감염 경로였다. 어딘가에서 유입된 ASF 바이러스에 오염된 음식물을 사육 돼지가 섭취했을 가능성, 유럽처럼 ASF 감염 돼지가 이동을 해 다른 돼지를 감염시켰을 가능성, ASF에 걸린 야생 멧돼지를 누군가 사냥하면서 옷이나 신발 등에 바이러스가 묻어 농가로 유입됐을 가능성 등. 이 모두를 염두에 두면서 국경 경계 강화부터 철저한 공항 검사에 들어갔다. 그 성과 중 하나가 작년 8월 중국 여행객이 국내로 반입하려던 소시지 에서 세계 최초로 ASF 바이러스 유전자를 검출하고 분석해낸 거다(이 결과를 담은 논문은 국제 학술지 'Emerging Infectious Disease'(EID) 6월호에 게재됐다).
―남북 접경지역 농가에서 ASF 발병 첫 사례가 공식 발표됐지 않나.
▷그래서 가장 가능성을 높게 두는 것이 북한에서 감염된 멧돼지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남한으로 유입된 게 아닐까 하는 거다. 당시 습격한 태풍 '미탁'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고. 북한엔 지난 5월 30일 ASF 첫 발생 사례가 세계동물기구에 보고됐다. 하지만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다. 추정컨대 초기 대응부터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확산 단계일 수도 있고.
―첫 사례 직후 조처를 설명해달라.
▷9월 17일 오전 6시 30분부터 전국적으로 스탠드스틸을 실시했다. 스탠드스틸은 발병지 일대 교통을 전부 통제하는 거다. 어떻게든 확산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살처분도 그동안 방역을 꾸준히 해왔으니 프로토콜이 있다. 거대한 통을 땅에 묻고 소독제를 함께 묻는다. 그 안에서 처리한다. 초반에 악취문제가 있긴 하나 철저히 대처하고 있다.
―양돈가 방문 당시를 기억하나.
▷생생히 기억한다. 시설 좋은 굉장히 큰 농가에서 농장주가 첫 신고를 주셨다. 시기가 추석 연휴가 끝난 직후였다. 퇴근 시간이 지나 모돈(母豚)이 폐사한 것을 보고받았다. 곧바로 관리수의사들이 조치에 들어갔다. ASF가 전국으로 퍼져나갈지 모를 위험을 막아야 하니까. 중국과 베트남처럼 되면 절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중국에서 첫 사례가 보고되기 5개월 전부터 지린성 한 농장 돼지가 집단 폐사하는 일이 있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농장주는 살아남은 돼지를 이미 여러 곳에 판매한 상태였고, 그 돼지를 사간 농장 중 하나가 최초 발생 농장으로 보고됐다. 이미 사태를 돌이킬 수 없었던 거다. 초기 대응이 그만큼 중요하다.
―발병 돼지를 발견한 농장주 반응은 대개 어떤가.
▷허탈해 하시던 농장주 모습이 눈에 훤하다. ASF에 대해 그동안 교육을 많이 받아 잘 아는데, 그래서 소독도 잘 해왔는데 너무나 허무하다 하시고···. 하루아침에 생업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참담하겠나. 시군마다 가축전염병 기동방역기구가 있다. 역학조사팀 관계자가 농장주 분들과 대화를 하는데, 대단히 힘들어 하신다더라. 허탈해 죽겠는데 자꾸 꼬치꼬치 캐물으니 화만 더 나고···.
―발병 돼지 확인은 어떻게 이뤄지나.
▷농장주가 돼지를 보는 시간대가 있다. 보통 아침, 저녁으로 나눠 사료를 준다. 아침에 좀 이상하면, 저녁 사료줄 때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식이다. 그래서 저녁 신고가 많다. 그럼 시도에 있는 가축방영기관 직원이 나가 돼지를 확인한다. 증상을 보고 폐사체면 부검한 후에 채혈과 시료 추출을 한다. 주변 돼지도 식욕부진이나 열 증세가 있는지 보고, 있으면 함께 채혈해 인근 헬기장 헬기에 시료를 싣는다. 그 헬기가 밤 11시에서 12시께 김천 어모면 군부대로 도착하는 거다. 이를 받자마자 해외질병과에서 진단 실험에 들어가 새벽 6시쯤 결과가 나온다.
-ASF 역사가 거의 1세기다. 왜 하필 이 시점인가.
▷전파 경로를 되짚어봐야 한다. 이름 그대로 아프리카가 근원지다. 1921년 우간다 정부에 자문을 구하던 과학자 몽고메리가 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98.9%라는 거의 100%에 가까운 페사율을 보인다는 게 확인됐으나 한동안 잊혀지는 듯했다. 물렁진드기를 빼면 다른 동물에선 증상이 없고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풍토병처럼 간주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1957년 유럽에서 문제가 터졌다. 1967년 이탈리아부터 유럽 전역으로 발병 사례가 접수됐다. 1970년대부턴 남아메리카 지역에서도 발병 사례가 이어졌다. 그중 스페인은 30년 이상 ASF가 휩쓴 곳이다. 그러다 2007년 옛 소련 연방이었던 동유럽 조지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2017년에 러시아 이르크추크로까지 옮겨붙는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중국 대륙으로, 올해 북한과 한국으로까지 전파됐다.
-현재 치료제 개발 가능성은 요원한가.
▷ASF 바이러스는 구조가 상당히 크고 복잡하다. 생존 능력 또한 뛰어나다. 더군다나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면역세포에서 자란다. 면역세포를 억제시키면서 성장하기에 백신 개발이 어렵다. 그리고 중국 발병 전까지 ASF 백신시장 자체가 크지 않았다. 아프리카는 이미 만연해 있고, 유럽은 살처분 정책으로 컨트롤했기 때문이다. 듣기로 세계동물보건기구 호세 마누엘 산체스 ASF표준연구소장이 백신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효과 실험이 끝나 특허도 낸 걸로 안다. 지금은 안정성 평가 단계를 거치면 2~3년 정도에 상용화가 가능하다더라. 중국에서도 자체 실험에서 효과를 본 백신이 개발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럼에도 복잡한 문제가 있다. ASF 백신은 동일한 유전형을 지닌 바이러스에 대해서만 효과를 본다. ASF 유전형이 무려 24가지다. 백신이 개발되어도 다른 유전형인 ASF에 대해선 100% 효과를 보장하기 어렵다. 게다가 ASF는 백신 개발을 위해 필요한 바이러스 세포주를 키우기 힘들다. 돼지에게서 세포주를 수거해 키워야 하는데 2주만 자랄 수 있다. 그 시기를 맞추는 것부터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ASF 연구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하게 된 건가.
▷학부 때부터 미생물학과 면역학에 관심이 컸다. 면역학이란 게 쉽게 말해 '나와 타자의 관계'에 관한 학문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병원체라는 타자와 나와의 상호 관계를 연구한다. 백신 개발도 마찬가지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라는 타자가 체내에 들어오면 나의 몸이 이를 적으로 간주해 방어 활동을 벌인다. 굉장히 다양한 세포들이 동원돼 마치 군대처럼 여러 단계를 거쳐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 세포들의 다양함과 방어 체계, 세포별 소통 방식 등이 경이로웠다. 이후 미국으로 가 광우병 유발 인자인 프리온 관련 질병을 공부하면서 돼지열병까지 공부하게 됐다.
-ASF의 국내 유입이 올해가 처음인 만큼 이론적 지식을 현장에서 경험한 게 처음일 텐데.
▷손에 잡히지 않던 게 손에 잡힌 느낌이랄까. 계속 연구실에서 실험만 하니 현장을 모른다는 답답함이 컸다. 내가 연구하고 실험한 게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알고 싶었다. 정말 중요한 건 실제 이론을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이지 않나. 내가 알고 있던 지적인 요소들이 실체화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농림축산검역본부로 온 건 그래서다.
(마지막으로 우문(愚問)임을 무릅쓰고서라도 묻고 싶은 질문 하나가 있었다. 과연 언제쯤 이 나라가 다시 ASF 청정지가 될 지를 말이다. '올 것이 왔구나'라는 표정으로 웃던 그는 말했다. "아니,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다만 이렇게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대처하고, 또 대처해야 한다는 것, 한치의 방심도 금물이라는 것.")
▶▶ She is…
아프리카돼지열병(ASF)과 관련해 국내에 보기 드문 전문가다. 2001년 서울대 수의과대학교를 졸업해 2006년 동
[김천 = 김시균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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