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거란이 침입해오자 조정은 그냥 항복하자는 파와 서경 이북 땅을 내어주고 타협하자는 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입니다. 이때 항복도, 타협도 아닌 제3의 안을 갖고 거란을 만나 되레 영토를 얻어 온 사람이 바로 서희입니다. 거란의 의도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끊는 데 있다는 걸 파악했거든요.
그래서 거란이 전쟁 중인 걸 이용해 거란이 고려 정복에 큰 힘을 쏟기 어렵고 고려를 견제하는 것에 만족하리라는 걸 판단한 뒤, 오히려 이를 영토 확장의 기회로 삼은 겁니다. 거란은 나중에 지신들이 내어 준 땅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돌려달라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습니다. 고려가 얼른 이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해 버렸거든요.
지리적 위치 때문인지 우리 역사는 늘 이렇듯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선택과 강요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북한은 물론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 미·중 무역 전쟁으로 중국의 눈치, 이제는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악화된 일본과의 관계. 이런 힘든 상황은 과거 고려 때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외교관들이 우리 역사에서 최고로 꼽는 외교관은 서희. 최악의 외교 상황에서 고려 시대 슬기로운 외교관을 국민만 그리워하는 건 아니라는 얘깁니다. 군에 총과 칼이 필요하다면, 외교관에게 필요한 건 국제 정세를 넓고 깊이 볼 수 있는 눈과 거기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혀입니다.
외교관 되기 쉽지 않잖아요. 보통 똑똑하고 머리 좋은 사람들이 고시나 특채를 통해 외교관이 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쪽에 들어가고 나면 바뀌는 건지, 아니면 지금 외교관이 되는 길이 잘못된 건지 매우 궁금해지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