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1858∼1926)의 전북 관찰사 시절 제작된 휼민 선정비(공덕비)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비석의 존치를 놓고 역사 기록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과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구한말인 1898년 전북 관찰사(도지사)로 부임한 이완용은 3년을 전북에서 지냈습니다.
이후 매국의 대가로 권력과 부를 누린 이완용은 사후에 치욕의 대상이 됐습니다.
이완용은 익산군 낭산면에 묻혔지만 자주 묘가 훼손되자 1970년대 후반 후손이 묘를 파 화장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완용의 공덕비가 한때 부안군 줄포면사무소 뒤편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뭅니다.
1898년 가을 부안군에 큰 해일이 들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줄포항의 배들은 십리동 마을과 장동리 원동 마을 부근 섬까지 밀렸다고 알려졌습니다.
관찰사 이완용은 부안으로 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줄포 시가지가 생겼습니다.
군수와 주민들은 이듬해 이완용의 구호사업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습니다.
공덕비는 폭 41.5㎝, 길이 109㎝, 두께 10㎝로 갓비(갓을 올린 비석) 형식으로 제작됐습니다. 현재 갓은 사라졌습니다.
이 비석은 광복과 함께 수난을 맞았습니다.
개인이 보관하던 비석은 1973년 줄포면장이 3천 원에 구매, 면사무소 뒤편에 세워놨지만 1994년 일제 잔재 없애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철거됐습니다.
지금은 줄포면사무소 창고에 보관돼 있습니다.
그러나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비석의 존치를 놓고 논쟁이 뜨겁습니다.
일부 주민은 '무조건 파괴'를 주장하고, 일부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맞서고 있습
김원철 부안문화원장은 "이완용이 본격적인 친일을 하기 전에 비석이 세워진 만큼 역사의 기록과 흔적으로 남겨야 한다"며 "매국노의 공덕비를 공개할 필요까지 없지만, 후세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보존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문화원 수장고에 공덕비를 보관하자고 군청에 건의했다"고 덧붙였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