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처럼 번진 3·1 만세운동 이후 여세를 몰아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고 항일 독립투쟁을 이끈 핵심 인물은 백범 김구입니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주석이기도 했던 김구는 일본은 물론 조선인 밀정의 눈까지 피해가며 독립투쟁을 이어갔는데요.
목숨 건 독립운동의 현장을 이권열 기자가 담아왔습니다.
【 기자 】
백범 김구와 그 주변을 맴돌며 동태를 살피는 조선인 밀정.
영화 속 김구의 삶은 과장이 아닙니다.
1930년대 김구가 중국인 추푸청의 도움으로 숨어 지냈던 항저우 주변 자싱의 집.
▶ 스탠딩 : 이권열 / 기자 (중국 자싱)
- "일본의 감시망이 좁혀지면 언제든 탈출할 수 있도록 김구 선생은 이렇게 방안에 비상탈출구를 만든 상태로 생활했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바로 호수가 나와 언제든 배를 타고 탈출할 수 있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 이후 일본은 현재 가치로 200억 원의 현상금을 내걸며 김구 체포에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김구의 은신은 김구를 도와준 중국인 가족들 사이에서도 극비였습니다.
▶ 인터뷰 : 추리젠 / 추푸청 손녀
- "오직 추푸청 선생과 추푸청의 큰아들, 그리고 그 큰아들의 부인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안심할 수 없게 되자 추푸청의 며느리는 김구를 친정으로 피신시킵니다.
조국을 배신한 한국인들마저 김구를 뒤쫓고 있던 터라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겁니다.
▶ 인터뷰 : 최봉춘 / 항저우사범대 교수
- "한국 사람들이 일본 측으로부터 돈을 받기 위해서 자기 아는 정보를 일본 총영사관에 제공하죠."
일본의 감시를 따돌리던 김구는 1938년 창사에서 밀정이 쏜 총알을 가슴에 맞습니다.
의사들이 치료를 포기한 상황에서 4시간이 지나도 살아있자 의사들이 치료를 시작했다는 게 백범일지의 기록입니다.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난 김구는 독립투쟁을 이어가지만, 1949년 독립된 조국에서 암살당합니다.
시체로 성벽을 삼아 독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백범 김구,
치열했던 삶 앞에 후손들은 한없이 숙연해집니다.
MBN 뉴스 이권열입니다.
영상취재 : 김석호 기자·이권열 기자
영상편집 : 김경준
사진출처 : 부산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