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11·11 도이치 옵션쇼크' 때 시세조작으로 피해를 본 개인투자자들이 관련 민·형사 판결이 나온 뒤 뒤늦게 소송을 냈더라도 손해를 배상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항소심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고 판결했지만 대법원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이번 판결로 당시 막대한 손해를 본 개인 투자자들의 추가 소송이 잇따를 가능성이 커서 결과가 주목된다.
◆ 배상청구권 소멸 안 돼
대법원 1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도모씨 등 개인투자자 17명이 도이치은행과 도이치증권을 상대로 낸 23억9720만원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손해배상 청구권이 이미 소멸됐다"며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원고 승소 취지로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고 10일 밝혔다.
이번 사건에서는 투자자들이 도이치 시세 조작에 따라 피해를 입은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가 쟁점이 됐다. 민법상 피해자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이 지나면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도이치 측은 "금융당국 조사결과가 발표된 2011년 1월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인투자자들은 "2016년 1월 형사재판에서 시세조종 행위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난 뒤 손해를 알게 됐다"며 맞섰다.
이에 재판부는 "일반인 입장에서 형사재판 판결 이전에 불법 시세조종 행위의 존재나 손해와의 인과관계를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세조종 행위의 위법성을 판단하려면 지수차액거래, 지수변동행위 등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즉, 개인투자자들은 불법행위의 존재와 그에 따른 손해를 분명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관련 민·형사 판결이 난 뒤부터 소멸시효를 기산(기준을 잡아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 도이치 옵션쇼크
판결문에 따르면 도이치증권은 옵션만기일인 2010년 11월 11일 장 마감 10분 전 2조 4000억원 어치의 대규모 주식을 시세보다 4.5%~10% 싼 가격에 팔아치웠다. 당시 주가가 폭락해 투자자들은 예기치 못한 큰 손실을 봤지만, 도이치 측은 주가가 떨어져도 미리 정해둔 가격에 주식을 팔 수 있는 권리인 '풋옵션'을 행사해 449억여원의 시세 차익을 챙겼다.
금융당국은 2011년 1월 도이치 측이 불법 시세조종 행위를 했다고 결론냈고, 그 해 8월 검찰은 관련자들을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1심은 시세조종 혐의를 유죄로 봐 2016년 1월 도이치증권 박모 상무에게 징역 5년 등을 선고했고, 도씨 등은 형사재판 결과를 근거로 이번 소송을 냈다. 앞서 1심은 "전문투자가가 아닌 이상 관련 민·형사 판결이 나온 2016년 1월 전에는 시세조종 행위의 정확한 사실관계 등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며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봤다. 반면 2심은 "도이치증권에 대한 영업정지 등이 있었던 2011년 2월에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알 수 있었을 것"이라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 "기관투자자, 손해배상 시효는 달라"
아직 소송을 내지 않은 개인 투자자들은 2019년 1월까지 추가 소송을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강모씨 등 개인투자자 11명이 도이치증권을 상대로 낸 6억원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지난 5월 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고 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소멸시효 문제가 해결된 만큼 승소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난 6월 대법원은 한국투자증권, 유안타증권 등 전문투자자가 2014년 8월 이후 낸 9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소멸시효가 이미 끝났다"며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같은 내용의 소송이지만 기관투자자들은 손해를 배상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대법원은 전문지식이 부족한 개인투자자와 달리 전문투자자들은 민·형사 판결 이전부터 불법행위를 인식할 수 있었다고 봤다. 대법원 관계자는 "위법행위에 대한 인식 가능성의 차이를 고려해 달리 판단한 것일 뿐, 개인투자자와 전문투자자에 대한 판결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일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은 이미 2011년부터 소송을 제기
이번 사건을 대리한 법무법인 한누리 임진성 변호사(39·변호사시험 3회)는 "기관투자자와 달리 개인투자자들은 복잡한 불법행위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는 점을 대법원이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부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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