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등재' 국채보상운동 기록물…국난 극복 열망 국내외에 알렸다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 한반도를 식민지로 편입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일제는 1904년부터 차관 도입을 강요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예속시켜 주권을 빼앗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나랏빚은 순식간에 불어나 1907년 1천300만원이 됐습니다. 대한제국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막대한 금액이었습니다.
그해 1월 29일 대구에 있는 출판사 광문사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했던 사장 김광제와 보부상 출신인 부사장 서상돈이 금연을 선언하면서 빚을 갚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들은 2월 21일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열어 500만원을 모금했습니다.
이 사실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민족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고종도 금연에 참가했습니다. 여성들은 반지와 비녀를 꺼내서 내놓았고, 걸인과 도적까지도 의연금을 냈습니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1910년까지 이어진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일체의 기록입니다. 우리나라 세계기록유산 중 유일한 근대 기록물입니다.
운동의 발단과 전개를 기록한 수기 12건, 운동의 확산과 파급을 적은 수기 75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일제 기록물 121건, 언론 보도 2천264건 등 2천472건으로 구성됐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기록물은 20세기 식민지와 피식민지 사이에 존재했던 외채 문제가 각지에서 현안이 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국내에 있는 영어신문이 국채보상운동을 보도했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거론된 뒤 중국과 멕시코, 베트남 등에서 유사한 방식의 외채 상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문화재청은 등재 과정에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시민적 연대를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채보상운동은 국가적 위기에서 시민들이 책임을 다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며 "국채보상운동 정신은 1997년 '금 모으기 운동'에서 볼 수 있듯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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