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위안부 영상, "서울서 김서방 찾기 같은 작업이었다"
73년 만에 세상에 나온 일본군 위안부 영상자료는 1940년대 미·중 연합군으로 활동했던 미군 사진부대 소속 병사를 일일이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됐습니다.
이들이 남긴 필름에 한국인 위안부의 모습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매달려온 2년의 작업이었습니다.
서울대 정진성 교수 연구팀이 끈질긴 조사 끝에 찾아낸 병사는 미군 164통신대에서 사진을 찍던 에드워드 C. 페이 병장입니다.
연구팀은 페이 병장이 남긴 흔적을 쫓아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필름 릴(reel) 수백 개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영상 발굴에 참여한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조각조각 끊어진 필름더미를 하나하나 확인해 모은 것이 18초짜리 영상"이라며 "마치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와 같은 작업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발굴의 가장 큰 의미는 한국인 위안부를 찍은 영상을 최초로 찾아냈다는 점입니다.
그간 방송을 통해 수없이 방영됐던 위안부 영상자료 속 여인들은 사실 중국인이었다. 영국군이 버마(현 미얀마) 인근 일본군 사령부를 점령한 뒤 촬영한 것입니다.
한국인 위안부 영상자료에 학술적인 가치를 크게 두긴 어렵다는 게 중론입니다. 감춰져 있던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서와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위안부 여인들의 세세한 표정, 행동 등이 이 영상자료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이들을 '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강 교수는 말했습니다.
영상을 통해 새롭게 확인된 사실들도 적지 않습니다.
일례로 영상에는 위안부 여성 7명 가운데 2명이 팔짱을 낀 채 꼭 붙어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강 교수는 "앞서 공개된 중국 운남성 송산(松山) 위안부 사진 4장을 보면 군인의 심문을 받는 여인 2명이 있다"며 "지금까지는 뒷모습만 나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는데, 영상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 둘과 동일인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간 공개된 사진 자료로 추정해보건대 이들은 미·중 연합군의 송산 공격 당시 헤어졌다가 상봉한 것으로 보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만난 터라 서로를 의지하며 붙어 지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944년 9월 일본군이 점령해 있던 송산을 미·중 연합군이 탈환했을 때 일본군 위안부로 있던 24명 중 10명이 생존해 포로로 잡혔습니다. 나머지는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거나 전투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영상 속 여인들은 모두 송산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체포된 이들입니다. 한국인 5명, 중국인 1명, 일본인 1명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중국군은 송산 위안부들을 곤명(쿤밍) 포로수용소로 데려갔습니다. 수용소에는 조선인 25명(여성 23명·남성 2명)이 있었습니다. 10명은 송산 지역, 13명은 등충(騰沖) 지역 위안부였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송산 위안소에서 촬영된 사진 속의 만삭 여인이 자신이라고 밝힌 고(故) 박영심 할머니가 대표적입니다.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 준비 과정에서 피해 사실을 밝혀 국제사회의 조명을 받은 박 할머니는 2006년 별세했습니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39명이며, 이 중 38명만이 생존해 있습니다.
서울대 연구팀은 계속해서
위안부를 촬영한 사진으로는 1944년 8월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의 심문을 받는 장면과 일본 오키나와에서의 미군 심문 장면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팀은 이번에 관련 영상이 남아 있는지 추적했지만, 발굴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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