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입양연대의 First Trip Home(고향으로의 첫 여행)에 참여한 19명의 한국인 해외입양인들이 8일 서울 종로구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전통요리 체험을 마친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뒷줄 가운데 빨간셔츠를 입은 이가 마이크 페데르손(한국명 이경용)씨이고, 페데르손 옆에 있는 남성이 폴 미셸(한국명 이애기)씨다. <한주형기자> |
34년 전인 1982년 1월 23일 이모(58)씨는 돌도 지나지 않은 자신의 아이를 한 입양기관에 맡겼다. 22살의 어린 나이에 남편과 이혼해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눈물을 머금고 본인 뱃속에서 태어난 아들을 입양기관에 넘긴 이씨는 철없던 시절 저지른 본인의 과오를 하루라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씨는 아들이 그저 잘 커주기를 맘 속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둘의 극적인 상봉은 지난 1일 마포구의 한 입양기관에서 비공개로 치러졌다. 34년만에 자신의 아들 마이크 페데르손(35·덴마크·한국명 이경용)씨를 본 어머니 이씨는 30여분간 절규하듯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상봉 이튿날 기자와 만난 이씨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아들이 살아만 있기를 기도해왔다”며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줘서 너무 고맙다”며 복잡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씨 말대로 아들은 ‘멋진 청년’으로 자라나있었다. 덴마크 입양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큰 그는 곧 물류회사를 차려 어엿한 사장님이 될 예정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기탄없이 그의 뿌리에 대해 현지 부모님과 얘기하며 자랐다고 했다. 그는 “여태껏 매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왔다”며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친부모님께 매우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어머니이기를 포기했던 자신을 오히려 위로해주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대견스러웠다”고 말했다.
페데르손씨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언젠가는 친부모를 만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며 “어제 어머니에게 ‘후회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과거는 묻고 앞으로 다가올 좋은 일만 생각하자’고 말했다”고 전했다. 페데르손씨는 약 2주간의 방한일정 동안 친모와 친부를 번갈아 수차례 만나며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지난 9일 기자와 다시 만난 페데르손씨는 “아주 편안한 기분”이라며 “하지만 여태껏 알지 못했던 정보를 너무 많이 알게 되 혼란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씨와 이혼한 페데르손의 친부 역시 아들과 극적인 상봉을 한 후 지난 2주간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이번 페데르손씨의 친부모 상봉은 입양인 가족찾기 지원기관인 해외입양인연대(GOAL·Global Overseas Adoptees‘ Link)의 연례 행사 ‘First Trip Home(고향으로의 첫 여행)’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해외입양인연대는 어렸을 적 해외로 입양된 후 한 번도 고국을 방문하지 못한 입양인들을 매해 초청하고 있다. 이번에도 19명의 입양인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보육 시설/발견된 주소지 등 연고지 방문 △입양 관련 기록 탐색 △DNA데이터베이스에 입양아 유전자 등록 등 친생가족을 찾기 활동을 함께했다.
이번 방한기간 동안 친생부모와 상봉한 이들은 페데르손씨 포함 총 4명이다. 하지만 입양인들의 친생부모 상봉이 페데르손씨 처럼 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난 1일 24년만에 친생모를 만난 김모(24)씨는 이튿날부터 일부 행사 일정을 취소하고 숙소에 남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갑작스러운 친모와의 상봉이 극도의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해외입양인연대 관계자는 “아직 어린 나이에 소화하기에는 워낙 큰 일이었을 것”이라며 “마음을 추스리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설명했다.
본인 역시 입양인 출신인 가현우 해외입양인연대 사무총장은 “입양인들의 상봉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전혀 기억이 없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을 자식으로 대하는 과정이 입양인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가 사무총장은 “친생부모들은 입양인들을 만나면 손을 잡고, 쓰다듬고, 밥을 떠서 먹여주는 등 그간 못해왔던 애정표현을 쏟아내지만, 입양인들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상봉 이후 시간 역시 순탄하지만은 않다. 수십년간 본인의 삶을 살아온 입양인들 입장에서 친생부모와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가 사무총장은 “입양인들은 친부모와의 상봉을 늘 고대하지만, 막상 실제로 만나게 되면 ‘이제 어쩌지?’, ‘내가 여기와서 살아야 하나?’, ‘난 한국말도 못하는데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지?’, ‘우리 관계는 어떻게 발전시키지?’라는 수만가지 의문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페데르손 같이 긍정적인 마인드로 상봉을 대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번에 방한한 입양인들 중에는 페데르손씨와는 달리 입양가족한테 학대를 당하며 불우한 삶을 살아온 이들도 있었다. 프랑스로 입양됐다가 40년만에 고국을 방문한 이애기(44·프랑스명 폴 미셸)씨가 대표적인 사례. 이씨는 “홀로 숲속 동굴에 버려지기 일쑤였고, 하루 종일 빨 한 조각과 물 한 잔만 주는 날도 많았다”며 어린시절 정신과 의사였던 프랑스 아버지 밑에서 우울했던 성장기를 털어놓았다.
지난 1972년 8월 9일 부산 진구의 한 가정집(당시 주소: 대연1동 6통 1장) 대문 앞)에서 신생아로 발견됐던 이씨는 이번 행사를 통해 친생모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를 많이 원망했다는 그는 “이제는 아무런 악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 만나게 된다면 ‘이미 다 용서했다’고 말해주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9일 프랑스로 돌아갔다.
가 사무총장은 “당장 만날 상황이 안 되더라도 괜찮다. 최소한 자식들이 본인의 실제 생일이나 기본적인 가족병력이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입양기관에 부디 연락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953년부터 지난해까지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이들은 총 16만7710명에 이른다. 이 중 67%인 11만2546명이 1970∼80년대 산업화 시기에 외국으로 보내졌다. 한 세대가 흘러 성인이 된 이들은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회귀하고 있다.
[연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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