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 쌓인 미곡처리장 줄도산 위기…5곳 중 2곳 적자
↑ 사진=연합뉴스 |
충북 옥천의 청산농협은 올해 미곡종합처리장(RPC·Rice Processing Complex)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적자가 불어나고, 채산성도 악화돼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20년 된 이 시설은 추수철 조합원한테 벼를 사들여 도정한 뒤 '청산별곡'이라는 이름의 브랜드 쌀을 생산해왔습니다.
한해 수매량이 3천t을 웃돌며 잘 나갔던 때도 있지만, 쌀 소비가 줄면서 경영이 팍팍해졌습니다.
벼를 비싸게 사들여 헐값에 파는 일이 반복되면서 매년 1억∼2억원씩 적자가 났습니다. 지금까지 누적된 적자만 30억원입니다.
신두영 조합장은 "작년 가을 벼 40㎏에 4만4천원씩 주고 사들였는데, 최근 쌀값이 20㎏에 4만원대 밑으로 떨어져 수지 맞추기가 힘들다"며 "벼의 도정수율이 72%인 점을 감안할때 쌀값이 이 지경이면 무조건 손해가 나는 구조"라고 하소연했습니다.
미곡종합처리장은 벼를 건조·저장·가공하는 설비를 갖춘 도정시설이다. 국내 쌀 유통의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수확기 농가에서 내놓는 벼의 70%가량을 흡수해 정부의 수매 기능을 보완하는 역할도 합니다.
그러나 쌀 소비가 줄고 가격이 생산비를 밑돌면서 전국 미곡종합처리장들이 줄도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 운영할수록 손해…문닫는 미곡처리장 속출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에서 운영되는 미곡종합처리장은 224곳입니다. 농협 소유가 149곳이고, 민간 시설은 74곳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협 RPC의 57%, 민간 RPC의 5.4%가 지난해 적자를 낸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RPC 5곳 중 2곳이 적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올해 문 닫을 예정인 곳도 3군데에 달합니다.
벼 매입 시세는 매년 조금씩이라도 오른 반면, 쌀값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충북에서 2번째로 큰 음성통합RPC도 적자 시설입니다.
2007년 문을 연 이곳은 해마다 농민한테서 계약재배한 추청 벼를 매입해 '다올찬 쌀'을 생산합니다.
지난해 이곳에서는 포대(40㎏)당 5만원씩을 주고 6천500t의 추청 벼를 사들였습니다. 혼합 품종의 벼까지 합치면 매입량이 자그마치 1만1천t이나 됩니다.
요즘 출하되는 다올찬 쌀(20㎏)의 공장도 가격은 3만4천∼4만원입니다. 벼 매입 대금에다가 인건비·물류비·감가상각 등을 합치면 적어도 4만원 이상 받아야 하지만, 시중 시세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 RPC의 관계자는 "전국적으로 쌀 브랜드가 넘쳐나면서 이천이나 철원 쌀 등 전국적으로 알려진 몇몇 브랜드를 빼고는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며 "20㎏에 3만원 하는 쌀이 시중에 돌아다니는 상황이어서 어정쩡한 브랜드는 경쟁 자체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올해 생산할 벼를 새로 사들이려면 늦어도 9월까지 재고를 모두 처분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매입단가보다 낮은 시세에 덤핑으로 벼를 내놓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 관계자는 "7명의 직원 가운데 현장 인력 4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영업에 뛰어든 상태"라며 "지금부터는 원가에라도 서둘러 쌀을 팔아 재고를 줄이는 게 최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RPC는 지난해 13억원의 적자를 냈습니다. 인근에서 영업하던 소규모 RPC 2곳은 경영난을 견디다 못해 지난해 도정라인을 뜯어냈거나 벼 보관시설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 조합원 눈치 보느라 벼 비싸게 사들이는 농협 RPC
농협 RPC의 적자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것은 벼를 비싸게 사들이기 때문입니다.
농협의 벼 매입단가는 이사회가 결정하는 데, 조합원(농민) 눈치를 봐야하는 조직이다보니 해마다 가격을 올려줍니다. 여기에다가 표를 얻어야하는 조합장의 '선심'까지 작용하면서 민간시설보다 비싼 값에 벼를 사들이는 일이 되풀이 됩니다.
충북지역 농협 RPC 12곳의 지난해 평균 벼(40㎏) 매입가격은 4만7천∼4만8천원입니다. 민간 RPC에 비해 1천∼3천원 높습니다.
이들 시설에서 한 해 처리하는 벼는 10만t에 달하는 데, 전체의 75%(9곳)는 적자를 내는 상황입니다.
농협 충북본부 관계자는 "농협 RPC에서는 손해가 나더라도 조합원의 벼 매입가격을 올려줄 수 밖에 없는 구조"라며 "결국 높은 매입 가격이 경영에 부담을 주고, 적자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단일 품종의 벼 계약재배를 확대하는 등 품질향상을 위한 경영컨설팅을 해주고 있지만, 농협이라는 한계 때문에 매입 가격이나 물량 등을 과도하게 떠안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지원방안이 검토돼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 정부 RPC 대형화 유도…업계 "구조적 문제, 재고 줄여야"
정부는 RPC의 대형화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매년 경영평가를 통해 6개 등급(A∼F)으로 분류한 뒤 최하위인 F등급은 지원대상에서 제외합니다.
높은 등급을 받은 곳에는 더 좋은 조건으로 시설개선자금을 지원하고, 한해 1조2천억원에 이르는 벼 매입 자금도 낮은 이자로 빌려줘 육성합니다.
이를 통해 과거 330여개에 달하던 RPC 가운데 30%가량이 시장에서 사라졌고, 전반적인 시설 수준도 향상됐습니다.
농식품부 식량산업과의 RPC 담당자는 "통폐합과 규모화를 통해 RPC 경쟁력이 향상되고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업계의 자구노력"이라며 "유통시장에서 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협회 차원의 공동노력 등이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업계는 시장구조 자체가 흑자를 낼 수 없게 돼 있다고 하소연합니다.
시중에 쌀이 남아도는 상황이어서 유통 마진을 챙길 수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박하다는 주장입니다.
대한곡물협회 관계자는 "지난 2월 국내 쌀 재고량은 183만t으로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권장량(80만t)을 2.3배 웃돈다"며 "재고물량이 절반 아래로 줄지 않는한 쌀 시장 안정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RPC는 단순한 도정시설을 넘어서 수확철 홍수 출하되는 벼를 사들였다가 서서히 시장에 푸는 공적기능도 한다"며 "이들이 적정 이윤을 남기면서 공적기능을 확대하도록 지원책이 강화돼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부는 쌀 시장 수급안정을 위해 매년 비축미 수매와 별개로 일정량의 쌀
지난해 생산된 쌀 432만7천t 가운데 신곡 수요량 397만t을 초과하는 34만3천t이 격리된 상태입니다.
RPC 업계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야 실타래처럼 얽힌 난국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MBN 뉴스센터 / mbnreporter01@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