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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충무로 옛 명보극장 터에서 54년째 신문가판대를 운영하며 충무공 생가터 기념표석을 관리해온 이종임 할머니. |
서울 중구 ‘인현동 1가 31-2번지’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옛 ‘명보극장’ 자리 한켠에 설치된 한 기념표석이 시민들의 무관심 속 30년 째 방치돼 있다는 것.
그럼에도 이곳에서 54년 간 신문가판대를 운영해온 이종임 할머니(80·사진)가 표석 주위를 청소하며 늘 깨끗한 모습으로 지켜왔다는 사실이다.
이 씨가 그토록 아끼는 이 표석은 다름아닌 성웅 이순신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기념 조형물.
1545년 충무공이 태어난 한성부 건천동 생가가 바로 이 자리였고, 서울시는 1985년 이를 알리는 기념표석을 만들었다.
그러나 워낙 작고 낮은 형태이다보니 잰걸음으로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이 표석은 차량의 보행로 침입을 막는 콘크리트 시설물(볼라드) 정도로 취급받아 왔다.
속절없는 세월이 남긴 퇴행성 관절염으로 거동조차 여의치 않는 이 씨가 이토록 회색빛 표석 하나에 마음을 쓰는 이유는 뭘까.
“젊은 나이에 고향 부산에서 혈혈단신 갓난아이를 업고 올라왔어. 명보극장 손님들에게 껌통부터 팔며 신문가판대를 차리고 애들을 키웠지. 그런데 언젠가 시에서 기념표석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이걸 잘 모르더라고…”
이 씨의 대답은 한마디로 ‘답답함’이었다. 나라를 구한 위인의 생가터임에도 표석을 만든 공무원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이 너무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무심코 버리는 쓰레기와 한밤 중 취객이 남긴 구토물, 비둘기 배설물로 몸살을 앓는 표석의 모습은 이 씨가 30년 째 지겹도록 목격한 무관심의 실체다.
보다 못해 직접 빗자루를 들고 표석 주변을 쓸고 깨끗한 물수건으로 표석을 닦기 시작했다.
“기자양반,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누가 있어. 사후관리를 (공무원들이) 안 한다고 탓할 게 뭐가 있어. 이렇게 위대한 분이 태어난 곳이고 옆에 있는 나라도 치워드려야지.”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도 한 청년이 표석 앞에 버젓이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한 행인은 담배꽁초를 던지며 지나갔다.
“매일 같이 저런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어떻겠어. 그런데 이제는 잔소리도 못해.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거든…”
이 씨는 연방 “내가 치우면 되지”라면서도 뭐가 아쉬운건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 씨는 충무공 탄신 470주년을 맞은 28일 오전 표석에 온갖 과일과 떡, 생선전 등을 올려놓고 엄숙하게 예를 올렸다.
“작년 이 날에는 아침부터 어찌나 비가 많이 오던지…줄줄 비를 맞고 절을 올리는데 누군가 우산을 받쳐주더라고. 참 고마운 분이었지.”
20대 중반에 이곳에서 터를 잡고 생계를 이어갔다는 이 씨는 “내 인생이 좀 억세. 내가 껌통부터 시작한 인생이야”라며 홀로 어렵게 3남1녀를 키워낸 세월을 얘기하기도 했다.
1961년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전’이 아직도 기억난다는 이 씨의 모습에서는 영화를 즐겼던 감수성 어린 20대 처자의 모습이 잠시 스치기도 했다.
속내를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54년 간 ‘가판대 인생’으로 살아온 그의 외로운 모습은 덩그러니 앉아 있는 충무공 기념표석과 많이 닮아보였다.
건강을 염려해 표석 관리를 그만두라는 자식들의 만류도 이제는 없단다. 이 씨는 “자식들이 그런 얘기 이제 안 해. 내 마음을 아는 건지…”라고 말했
충무공 탄신 470년. 이 긴 시간을 16개의 마디로 구분하면 이 중 한 마디는 오롯이 ‘이종임’이라는 이름이 생가터에 자리잡고 있었다.
표석을 정성껏 닦아온 이 씨의 마음 한 켠에는 시민들의 무관심이 함께 씻겨 내려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을 터였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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