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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 초기 한국은행을 이끌었던 김건(金建) 전 한은 총재가 18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88년부터 제17대 한은 총재직을 수행했던 고인은 중앙은행 독립을 둘러싼 한은법 파동과 금리 자유화 논란이 불거졌을 때 한은 입장을 적극 주장해 한은 독립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영문 이름 이니셜인 ‘KK’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민주화 바람이 불던 1988년 11월 14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정부 여당이나 야당의 한은법 개정안은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거리가 있다”고 주장해 바람을 일으켰다. 한은 출신 총재로서 ‘독립성 제고’라는 직원들의 열망을 잘 알고 있었던 고인이 총대를 메고 한은 독립운동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던 셈이다.
이후 한국은행 직원들은 총재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뒤 ‘중앙은행 중립성보장추진위원회’를 결성, 전국 15개 도시에서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1988년 11월 시작된 서명운동은 1989년 1월까지 2개월 만에 서명자 수가 100만명을 돌파하는 등 뜨거운 열기를 분출했다.
당시 한은에 재직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김학렬 연세대 특임교수는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한은 독립을 외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김 전 총재는 직원들의 서명운동을 암묵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회상했다. 김 전 총재 재임시 ‘금융통화운영위원회’(현 금융통화위원회)는 재무부 장관이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재무부 장관이 직접 회의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정부 입김 아래 재할인율 결정 등 주요 안건을 결정했었다. 김 전 총재의 의견 표명과 한은 직원들이 움직임은 추후 1997년 말 한은법 개정을 위한 기반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51년 한은에 들어가 외환관리부장, 조사1부장, 자금부장, 부총재, 은행감독원장 등 요직을 역임한 정통 ‘한은맨’이다. 이후 1983년부터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8년 3월 친정으로 돌아와 4년간 제17대 한은 총재로 일했다. 1950년 한은 설립 이후 한은법이 개정돼 한은 총재의 임기와 독립성이 보장되기 시작한 1997년까지 4년의 임기를 채운 총재는 김유택(1951∼1956), 김세련(1963∼1967), 김성환(1970∼1978), 김건 등 4명에 불과하다.
1929년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 씨
[김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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