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4회 1등 당첨자 |
공식적인 자리에선 본인의 진짜 이름이 아닌 가명을 이용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로또 1등 당첨자들. 11일 로또 1등 당첨자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 사람이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 814만분의 1이란 점을 감안하면 로또 1등 당첨자 4명이 한날 한시 같이 만날 확률은 더더욱 숫자로 헤아려보기가 힘들다.
KTX를 타고 지방에서 막 올라왔다는 주영훈(가명·604회 1등 당첨자·당첨금 12억원)씨, 서울 인근에서 차를 직접 운전해 왔다는 한호성(가명·477회 1등 당첨자·당첨금 19억원)씨를 비롯해 근래 보기 드물게 30억원대 1등 당첨금을 거머쥔 권도운(가명·501회 1등 당첨자·당첨금 30억원)씨, 이기성(517회 1등 당첨자·당첨금 26억원)씨는 이날 강남 고급 호텔에 모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참고로 이들 4명이 받은 1등 당첨금 총액은 87억원, 으리으리하다.
로또 1등에 당첨된 지 2주밖에 지나지 않은 주영훈씨가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깼다. 그는 로또 1등에 당첨된 이후 달라진 변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먼저 답을 했다. 이어지는 다른 당첨자들의 얘기 속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는데 4명 모두 로또 1등 당첨 이후 빚을 우선적으로 청산했다는 점이 공통적이었다.
주영훈씨) 아직도 내가 로또 1등에 당첨된 게 믿기지 않는다. 당첨금을 받은 이후 특별히 달라진 변화는 없고 빚 청산만 했다. 사실 빚이 좀 많았다. 사채는 물론 친인척들의 돈을 끌어다가 사업자금을 댔다. 하지만 사업이 잘 안돼 모두 빚으로 돌아왔다. 10억원이 넘는 빚이었다. 하지만 로또 1등에 당첨된 후 깔끔히 청산해 이제는 살 것 같다.
이기성씨) 한동안은 로또 1등 당첨 사실에 어안이 좀 벙벙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온 만큼 다른 분들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업을 시작했다. 아직 정상 궤도에 올라오진 않았지만 사업을 하며 진 빚을 갚고 나머지 자금으로 계획했던대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한호성씨) 당첨금을 받자마자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빚을 청산했다. 그리고 나서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기 위해 전원주택 한채를 구입했고 나머지 당첨금은 연금으로 뭍어두고 있다. 창업을 준비하는 자금 외에 기본 생활비 등 필요한 돈은 직접 벌어쓰고 있다.
빚을 한꺼번에 다 갚았다는 3명과 달리 권도운씨는 지금도 차근차근 나눠서 갚고 있다고 전했다. 빚을 '한 방'에 갚고도 남을 정도로 당첨금이 가장 큰 권씨의 행동에 모두들 의아해했다.
권도운씨) 나 역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빚이 많다. 하지만 한꺼번에 다 청산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꺼번에 그렇게 큰 돈을 다 갚아버릴 경우 주변에서 의심을 살 수 있어서다. 그래서 조금씩 나눠서 갚아가고 있다.
앞선 3명의 당첨자들은 권씨의 말에 그제서야 공감을 표했다. 로또 1등 당첨 사실을 주변에 노출하지 않으려는 조심성이 엿보였다.
한호성씨) 사실 내가 로또 1등에 당첨된 지 3년이 다 돼 가지만 여전히 부모님은 내가 로또에 당첨됐다는 것을 모르신다. 연로하시다보니 너무 놀라실 게 우려가 되고 또 돈으로 인한 불안감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알려드리지 않았다. 세상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다. 형제들 사이 돈을 좀 더 쓰는 일이 생기면 다들 '아 얘가 요즘 돈벌이가 좀 괜찮은가보다'정도로만 생각하게 행동하고 있다.
이기성씨) 나 역시 이 세상에 아내와 둘 밖에 로또 1등 당첨 사실을 알지 못 한다. 아들에게는 절대 알려주지 않을 계획이다. 돈은 스스로 벌어 값지게 써야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이들의 과거 생활은 어땠을까.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로또 1등 당첨자가 아닌 로또 한장에 실오라기 희망을 걸었던 때의 생활 얘기를 들어봤다.
한호성씨) 부모님의 빚 5억원을 떠안기 전까지만 해도 고정적인 월수입 보장된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생긴 빚으로 하루에 2~3시간 밖에 못잘 정도로 여러가지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 결과 2억원 정도 빚을 갚을 수 있었지만 설상가상 부모님이 모두 다 편찮으셔서 병원비 부담까지 짊어져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그러다보니 부모님의 빚을 한번에 갚을 수 있는 길은 로또 밖에 없다는 생각에 처음 로또를 사기 시작했다.
이기성씨)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던게 6개월간이었다. 이후 1년은 재활을 받았다. 사고 전만해도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손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고 결국 퇴직을 했다.
주영훈씨) 당첨되기 이전의 과거 기억은 다시는 하고 싶지가 않을 정도다. 금융권 빚이야 어떻게해서든 갚아보겠는데, 친인척들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생긴 갈등은 나를 참 버겁게 했다. 만나서 눈도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어려웠다.
그런 힘들 시절 속에 접한 1등 당첨 소식을 이들은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주영훈씨) 그날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시간이 다 멈춰버린 듯한 느낌에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까지 고생했던 가족들,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준 가족들 생각에 울컥했다. 그 때 느낀 감동은 지금까지 살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하늘에서 준 복이라 생각한다.
이기성씨) 집사람과 함께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다.
권도운씨) 음, 물론 1등 당첨 소식을 전해 들은 그 날이 제 인생에 있어 새로운 시작이 되는 날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짜증도 좀 일었던 날이다. 왜냐하면 야간근무를 마치고 막 잠든 시간 걸려온 전화였기 때문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됐다는 말에 처음에는 장난전화인줄 알았다(웃음). 하지만 언제라도 그 때 그 심정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당첨금을 찾으러 가는 길 기분은 어땠을까. 떨리기도 하고 혹시라도 1등 당첨 사실을 증명해줄 로또 용지를 잃어버릴까봐 조마조마했다는 이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모두들 기분 좋았던 경험이라고 기억했다.
주영훈씨) 당첨금을 찾으러 가는 많은 1등 당첨자들이 겁을 많이 낸다는 데 나는 오히려 농협으로 가는 길에 기념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내 일생에 단 한번 소중한 순간 아니냐란 생각에서였다. 물론 농협 본점으로 들어가기까지 누군가로부터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는데 그 어떤 일도 없었다.
한호성씨) 흔히 농협 앞에는 1등 당첨금을 노리는 조직폭력배나 기부금을 요청하는 자선단체가 많이 있다고들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로또 1등 당첨자와 농협은행 방문고객들 간 구분이 전혀 안돼 해코지 당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이기성씨) 난 조마조마 했다. 지방에서 KTX를 타고 올라왔는데 막상 도착시간이 농협은행 점심시간에 걸려서 한 시간 뒤에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나 떨리던지, 잊을 수가 없다.
로또 1등 당첨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로또를 구입한다고 했다. 또 한번 당첨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다.
한호성씨) 맨 처음 로또를 살 때 일주일에 2만원어치씩 샀다. 당시 담배를 참 많이 피웠는데, 담배 살 돈으로 로또를 사 담배를 끊을 요량으로 산 것이다. 지금은 여유가 좀 생겨 4만원어치씩 산다(웃음)
권도운씨) 취미생활로 회사 동료들끼리 5000원씩 사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당첨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집중적으로 샀다. 지금도 물론 5~6만원어치씩 사고 있다. 또 한번 1등에 당첨될 것 같다는 기대감에서다.
권씨는 로또를 지금도 구입하는 이유로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보유한 부자들의 세계를 알게돼 도저히 그만둘 수 없다는 얘기도 했다.
권도운씨) 은행에서 VIP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소개팅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정말 나와 급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가진 30억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수백억원대의 자산가들을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 처음에는 이것저것 사고 싶은 것들을 사는 데 돈을 썼다면 그때 그 소개팅 경험을 하고 나서 돈을 더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나를 두고 주변에서 짠돌이라고 부를 정도로 돈을 아껴서 쓰고 있다.
누구하나 돈을 흥청망청 쓰지 않는 로또 1등 당첨자들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행운인만큼 주변의 이웃들을 위해 당첨금을 써야한다는 데 공감했다.
이기성씨) 하늘에서 준 선물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하면 당첨금을 유용하게 쓸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 개인 사업을 조그맣게 시작했는데 우선 직원들과 어떻게 하면 상생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일단 이익이 생기면 생기는대로 사회환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로또를 지금까지 구입하는 이유도 내가 당첨되도 좋고, 내가 들인 돈이 또 다른 사람들의 행운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마음도 크다.
한호성씨) 로또 1등에 당첨되기 이전부터 주변에 어려운 형편에 있는 형제들을 잘 도와주는 편이었다. 주변에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살아야한다는 마음은 늘 갖고 있다. 지금도 형편이 어려운 친인척들에게는 내가 돈
주영호씨) 일단 큰 빚을 청산하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러다보니 남을 도울 생각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지금 다니는 직장생활도 계속 할 계획인데, 그러면서 지금까지 내가 받은 행운을 남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매경닷컴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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