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주 삼성경제연구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연구원들을 모아놓고선 "오면서 농담으로 삼성이나 이런데서 기본소득을 이야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사실 제가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그(기본소득)이야기를 했다"는 깜짝 발언까지 보탰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국내 최대 재벌그룹 총수에게 자신의 대표공약인 기본소득 지지를 요청했다고 커밍아웃을 한것인데 귀를 의심했다.
대선후보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사기업과 총수에게 '내편에 서라'는 식의 주문을 한것이나 마찬가지이기때문이다. 놀라운 일이다.
정경유착 악습을 타파해야 할 정치인이 되레 기업을 정치판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를 서슴없이 한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말이 없게 됐다.
더군다나 성남시장때 족벌재벌 해체와 이 부회장 구속을 앞장 서 주장하고, 불과 얼마전까지도 대기업을 적폐시했던게 이후보 아니었던가.
삼성을 기본소득 지원군으로 삼으려하는 갑작스런 표변이 어리둥절할 정도다.
뭐 생각이 바뀌면 그럴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 3분의 2가 반대하고, 당내부인사에게조차 그 실효성과 필요성을 설득하지 못해 끈 떨어진 연이 된 기본소득 공약에 기업은 왜 끌어들이나.
기업을 대선판에 동원하겠다는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적절한 처사다.
지난 7월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때 다른 후보들이 일제히 '기본소득은 매표용 포퓰리즘이자 비현실적인 몽상'이라고 공격하자 이후보는 "기본소득은 제1공약이 아니다"고 했다. 공약철회에 가까웠다.
이에 지지층이 반발하자 7월 하순에 기자회견을 열어 "2023년 1인당 25만원으로 시작해 임기내 최소 100만원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며 기본소득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재표명한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여론이 확산되고,당내에서도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무리한 공약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다시 이달들어 1일 "국민들이 끝까지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그런데 이처럼 기본소득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한지 이틀만인 3일 삼성경제연구소를 방문해 뜬금없이 기본소득을 또다시 언급하는 오락가락 행보를 거듭하니 혼란스럽다.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 내편에 서는 정치적 선택을 하라는 식으로 들리는 기본소득 지지 요청은 기업에겐 엄청난 압박일수 밖에 없다.
특히 상대가 이 부회장이라면 더 그렇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정권때 대통령 요청으로 뇌물을 공여하고 가업승계라는 묵시적 청탁을 한 혐의로 실형까지 살았다. 수감생활을 지속하다 지난 8월 가석방으로 나온지 몇달되지도 않았다.
아마도 권력자와의 만남이 진저리가 나고, 정치인들과는 되도록 거리를 두고 싶은게 이 부회장 심정일것이다.
이런 이부회장에게 이 후보는 기본소득을 툭 던졌다. 이 부회장이 기가 막혔을것같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주문인지라 이게 농담을 한건지, 정말 지지선언을 해달라는건지, 부정적으로 말하면 나중에 해코지는 안당할지, 머리속이 복잡했을듯 싶다.
대권 후보가 권력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기업인에게 기본소득 얘기를 꺼낸것 자체가 겁박이나 매한가지다. 이 부회장에겐 공포로 다가왔을수도 있다.
이 후보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강변할 것이다. 하지만 기업과 기업인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것이다.
사실 '기업과 재벌 총수가 내 발밑에 있으니 내가 함부로 다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런 황당한 요구를 할수는 없다. 이런게 바로 정치권력의 갑질이고 기업 길들이기다.
지난달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이 부회장은 "(현지에서)냉혹한 현실을 직접보고 오니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세계최고 기업 반열에 오른 삼성조차도 거센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을까하는 위기의식을 내비친것
7일 이례적으로 삼성전자 3개 사업부 대표이사를 모두 교체하는 승부수를 띄운것도 이런 위기감의 반영일 것이다.
경영에 올인해도 부족할 기업 총수에게 비상식적 요구를 하는 정치권력의 갑질은 적폐중의 적폐다.
기업 안도와줘도 되니 제발 그냥 좀 가만히 내버려둬라.
[박봉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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