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맥아더 스스로 '점령군' 밝혀"
"김일성 권력 장악, 소련 결정·후원에 의한 것"
↑ 사진 = 픽사베이 |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최근 불거진 '미군 점령군' 논란과 관련해 "북한에 소련군 출신들로 군사정권 세운 소련은 해방군, 남한에 사민정권 수립 도와준 미국은 점령군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라고 지적했습니다. 태 의원은 북한의 고위 외교관 출신입니다.
6일 태 의원은 페이스북에 "광복회장의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 발언으로 촉발된 역사논쟁으로 남남갈등이 첨예하다"면서 "그러나 포고문에 적힌 문구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 볼 때 과연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등식이 성립할지는 의문"이라고 적었습니다.
앞서 광복회는 "해방 후 한반도에 진입한 미군과 소련군은 각각 포고령을 발표했다. 소련군 치스차코프는 스스로 '해방군'임을 표방했지만, 미군 맥아더는 스스로 '점령군'임을 밝히고, 포고령 내용도 굉장히 고압적이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원웅 광복회장은 이 '역사적 진실'을 말한 것뿐"이라며 "한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한국인을 무시한 맥아더를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태 의원은 이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직시한다면 소련군이나 미군은 다 같이 해방군이자 점령군이었다고 볼 수 있다"면서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군에 대한 무장해제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점령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지금에 와서 역사를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소련군이나 미군의 공식 문서들에 한반도 주둔 성격을 어떻게 표현했든 미군보다는 소련군이 더 점령군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광복회의 주장과는 상반된 의견입니다.
아울러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김일성 등 소련군 내 조선인들의 군복을 벗기고 사민복을 입혀 당과 군대 국가건설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북한 정권 수립 초기 참여한 세력은 조선공산당 출신 국내 인사들과 남한 출신의 남로당, 중국공산당 출신 연안파, 상해임시정부에서 올라간 김원봉 등입니다. 이들 가운데 주축은 스탈린의 지지를 받은 김일성과 김책, 최용건 등 소련군 88여단 출신들로 군대를 장악해 무기를 독점한 상태였으므로 다른 정치세력들은 권력투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태 의원의 설명입니다. 2차 대전 후 소련군이 진주한 많은 나라 가운데 북한처럼 소련군 내 장교와 사병들을 제대시켜 정권의 핵심 인사로 임명해 정권을 세운 나라는 없었다고 덧붙였습니다.
↑ 서재진 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통일연구원) / 사진 = 통일연구원 |
통일연구원이 2006년 펴낸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를 보면 김일성이 소련에 의해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옹립되는 과정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북한과 공산주의 연구의 대가인 서대숙 전 미국 하와이대학교 석좌교수는 소련 점령당국이 북한을 소비에트화 하였고 김일성의 권력 장악이 소련의 결정과 후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스칼라피노, 이정식 등 다른 북한 연구자들은 소련이 북한에서 최종 결정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김일성은 그 당시 어느 지도자보다 외국의 '괴뢰'라고 주장했습니다. 김일성이 소련의 꼭두각시였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일제 패망과 더불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대가 북한지역을 소비에트화해 친소정권을 수립한 사실은 소련에서 공개한 공식 문서들을 통해 증명됩니다. 소련의 북한에 대한 지배권 확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북아에 대한 지배권 확장과 부동항의 확보, 미국에 대한 견제 등 여러 면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소련이 해방 후 북한에서 친소 정권을 수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최고 지도자와 권력엘리트를 소련을 지지하는 인물로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이 미약했기 때문에, 책임있는 직책을 맡길만한 현지의 공산주의자가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됐습니다. 소련 군정당국은 당시 평양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가였던 조만식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조만식은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으므로 소련은 북한 정권의 간부들을 대거 소련에서 차출합니다.
김일성이 북한 입북 전에 이미 소련 당국으로부터 북한의 새 지도자로 낙점됐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당시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부관이었던 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 이반 이바노비치 코바넨코는 1993년, 김일성의 선발과정을 처음으로 증언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72세였습니다. 1945년 8월 24일 대일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북한 소비에트화의 조기 정착을 위한 지도자 후보 선정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초순,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리에프 원수가 극동군에서 추천한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긴급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지시로 하바로브스크에서 소련군 특별수송기 편으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냈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증언은 중앙일보특별취재반이 1993년 펴낸 '[비록]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 이뤄진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와 스탈린의 면담은 식사를 겸해 4시간 동안 진행됐습니다. 면담 후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 정권의 최고지도자 후보로 내정하고, 소련군으로 하여금 그를 적극 지원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면담 사실은 증언뿐 아니라 소련 문서를 통해 확인됩니다. 심사기록에 나와 있는 소련 극동군 관계자와 김일성의 대화 일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당신은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북조선으로 일하러 가라고 제안한다면?”
“세계혁명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요.”
태 의원은 "북한 김일성도 자신과 부하들이 1940년대 소련으로 들어가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다가 1945년 소련군 군복을 입고 북한에 들어온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북한 주민들에게 자기 부대가 북한을 해방시켰다고 세뇌교육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남한에 사민 정권이 수립되도록 도와준 미군이 해방군인가? 아니면 북한에 소련군 출신들의 군사정권을 세운 소련군이 해방군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또 "대한민국 건국 초기 우리 정부 내각에 미군 출신 인사들은 한 명도 없었다"면서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해방군, 남한에 들어온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차라리 대북전단이라도 북한에 보내 북한을 해방시킨 것은 김일성 부대가 아니라 소련군이라고 알려주는 것이 국익에 더 이로울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 남한 점령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포고 제1호 / 사진 = 우리역사넷 |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 홈페이지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남한 점령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포고 제1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포고문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본 천황의 명령에 의하고 또 그를 대표하여 일본 제국 정부의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 인민은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그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점령이라는 표현과 함께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 이행과 인간적, 종교적 권리 확보에 있다는 점도 명시돼 있습니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대선주자들이)자기의 역사관을 드러내고 국민의 객관적 평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면서도 "이 과정에서 사실관계나 상대방의 표현을 왜곡하는 것은
'점령군'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점령을 하는 이유가 일제로부터 한국을 자유롭게 해방하고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 명시돼 있다"며 "그러한 목적을 간과한 채 용어만 가지고 설명한 것은 미군정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훼손하려 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신동규 기자 easternk@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