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전날(4일) 전격 사퇴하면서 정치권의 셈 계산도 빨라지는 모습입니다.
윤 전 총장이 어제 대검찰청 앞에서 "저는 오늘 총장을 사직하려 합니다"라고 운을 뗐을 때, 법조계와 정계 모두 '사직'이란 단어보다 '오늘'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서초동을 떠날 거란 건 주지의 사실이었으나 그 시점이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던 탓입니다.
사의 표명 직전 언행들에 이어 사퇴의 변까지 하나하나가 정치적 행보로 읽히면서 윤 전 총장을 바라보는 여권 내 대권 주자들의 온도차도 뚜렷합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오늘(5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직자로서 상식적이지 않은, 뜬금없는 처신"이라고 날을 세웠습니다.
이 대표는 "본인 스스로가 검찰총장 재임시절부터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기소 논란 등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격렬한 시비를 일으키더니 사퇴도 그렇게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어 "정치 진입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정치 선언을 했다"는 말로 불편한 기색도 감추지 않았습니다.
윤 전 총장이 그간 보인 말과 행동을 정치에 뛰어들기 위한 발판으로 치부, 출마의 명분도 없고 수사의 정당성 역시 의심된다는 취지로 해석됩니다.
윤 전 총장의 거취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며 '경고'를 보낸 정세균 국무총리 역시 어제 "대단히 유감스럽다"면서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 보다 하는 느낌은 있었다"고 언급했습니다.
반면 대선주자 지지율 1위인 이재명 경기지사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지사는 전날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윤 전 총장의 사퇴와 관련해 "착잡하다"면서도 "이제 한 명의 국민으로서 정치적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결국 정치를 할 걸로 판단되는데 잘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세상에 입장은 다양하니까 합리적으로 경쟁하고 그 과정을 통해 국민에게 도움되는 정치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윤 전 총장이 실제 정계에 들어와 대권까지 나선다면 '선명성'과 '스토리'가 강점으로 꼽힙니다. 집권세력을 겨냥한 수사를 둘러싸고 보수·진보 정권 모두와 각을 세우며 좌천과 영전을 오간, 소위 '바람'을 일으킬 재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윤 전 총장의 색깔과 무엇보다 '등판 시점'이 이 대표보단 이 지사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할 거란 전망이 나옵니다.
'미니 대선'으로 불리는 4.7 재보궐 선거 총괄 책임자로서 상황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이 대표 입장에선, 아직 물음표에 감춰져 있는 윤 전 총장의 정치적 영향력이 최대의 리스크로 떠오른 상황입니다.
만약 윤 전 총장이 정권 비판 수위를 높여 야권이 결집하고 그 결과가 서울-부산시장 선거의 승패로 이어진다면 이 대표는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그동안 윤 전 총장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여권이 때리기에 나서면 윤 전 총장의 정치적 몸집과 무게가 커졌던 양상이 반복돼 왔다"며 "(이번 보궐선거 때도) 그렇게 된다면 중도의 표심이 윤 전 총장 쪽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고 야권 입장에선 중도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단 점에서 힘이 될 수 있는 반면, 여권 특히 이 대표 입장에선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반대로 이 지사 입장에선 여권 지지층 내에서 친문-비문 논란으로 자신에게 끊임없는 견제가 들어오는 와중에 외부 대항마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호재가 될 수 있습니다.
친문 지지자들도 이 지사가 '밉든 곱든' 정권 교체를 막아야 한다는 대의 아래에선 결국은 여권 단일 후보로 뭉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윤 전 총장의 사퇴 전이긴 하지만 가장 최근인 엠브레인퍼블릭 조사(엠브레인퍼블릭, 케이스탯리서치, 코리안리서치인터내셔널, 한국리서치의 의뢰 / 지난 1~3일 실시)에 따르면 대선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이재명 27%에 이어 이낙연 12%, 윤석열 9% 순이었습니다.
윤 전 총장의 경우 올해 1월 처음으로 30%대를 기록한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 추세이긴 하지만, 진영 간 세 결집이 가속화되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윤 전 총장은 제1야당의 명시적·잠재적인 인물난 속에 보수층의 독보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중도층과 50대 이상에서도 꾸준히 두 자릿 수 지지율이 나와 확장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만, 정치적 입지가 '제로'인 점은 명확한 한계입니다.
이른바 '조국 사태'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의 갈등에서 지지율이 급상승한 걸 보더라도 아직은 본인이 '발광체'가 아닌 '반사
이런 부분은 전적으로 본인의 내공과 정치력에 달려 있다는 데는 여야 모두 이론이 없습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을 1년여의 시간 동안 윤 전 총장의 역량에 따라 정치 판세가 급변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 박유영 디지털뉴스부 기자 / shine@mbn.co.kr ]